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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하여 페이지별 내용을 오늘에 간추려 본다.(이미 회고록으로 올린 글을 보면서- 편집인 김안수)

당시 유신정부는 시국에 대한 청와대 강변일변도식 대처에 오히려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는 듯 했다. 한편 79년 8월부터 장영자(불명:보각행)가 느닷없이 등장하여 용두관음보살상을 가지고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때였다. 당시 신문 기사는, 고뇌중생을 고통으로부터 해탈케 해주는 대비원력의 신통력을 가진 성자로 불리는 33관음 중의 하나인 용두관음보살상이 1천6백년 한국불교사상 처음으로 출현해 불교계의 큰 경사가 되고 있다. 서울 칠보사의 돈독한 불자인 장보각행 여사가 소장해 오다 9월 4일 공개한 국보급의 이 관음보살상은 중국 청나라 때 것으로 일제말엽 일본인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했다.또 황수영 동국대 박물관장은 『이 용두관음보살상은 중국에서도 으뜸가는 불상중의 하나로 국보적인 가치와 함께 불자들에게도 큰 원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칠보사에서 점안법회때 많은 불자들이 운집했던 것 같다. 교계에 소문이 파다했다. 이때 국제불교도협의회 하은려 이사장도 참례하고 온 뒤에, 장영자(보각행)를 국제불교도협의회에 영입할 수 있길 원했다. 나는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그래서인지 KBS-TV를 통해 황수영 동대 박물관장이 설명하는 용두관음보살상 방영프로를 주선했다고 내게 알린 때였다. 그 당시 내게 알려진 장보각행보살은 불교계에 큰 시주금을 선뜻 내어 여러 곳의 군법당 불사를 위해 사용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때였다. 그렇지만 그 뒤에 관세음보살이 화현한 것처럼 소문이 돌고 있던 장보각행보살의 처신은 매우 못마땅하게 보았던 나다.

이 무렵 부마사태로 정국은 심각한 불안상태에 있었다, 부마민중항쟁(釜馬民衆抗爭)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광역시와 마산시(현 창원시)에서 유신체제에 대항한 항쟁을 말한다. 10월 16일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의 구호와 함께 민주화 시위를 시작했다. 다음날인 17일부터 시민 계층으로 확산된 것을 시작으로 해서, 18일과 19일에는 마산 지역으로 민주화 시위가 확산됐다. 당시 유신정권은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66명을 군사 재판에 회부했으며, 10월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을 출동시킨 후 민간인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위키 백과에서)

이러한 때 79년도 조계종은 77년 8월 이후 계속된 내분으로 종단이 완전 두 동강이 난 채 진통을 거듭해 왔던 때다. 문공부 등 전국신도회(이후락회장)가 내분을 수습하겠다고 거중조정에 나섰지만 모두가 실패한 채 내분의 소용돌이는 더욱 깊어만 갔다. 법원으로 양측은 계속되는 제소로 골만 깊어갔다. 1979년에는 분규 중에 조계사 및 개운사에서 각각 별도의 봉축 법요식을 개최해 모두 다 망신을 사기도 했던 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