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호2면

 

 

 

추가하여 페이지별 내용을 오늘에 간추려 본다.(이미 회고록으로 올린 글을 보면서-편집인 김안수)

나의 운신 폭은 한계에 닿았다. 벗어날 길을 찾아본다.

81년은 나에게 있어 일대전환을 가져왔다. 이제 혼자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펼칠 길이 막막해진 혼자가 아니던가. 그래서 81년 새해 벽두부터 국제불교도협의회를 이끌어 갈 방도는 한계에 있었다. 그간의 주요임원 최세경, 하은려, 방금봉, 그리고 박재원 체제에 이어지며 배후의 힘이 되었던 분들이 모두 떠난 뒤였기 때문이다. 홀로 남은 내가 무엇을 어떻게 꾸려나갈 수 있을까 암울하기만 했다. 그래도 새로운 연대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 일단 내부 개편부터 했다. 회장은 당분간 공석으로 두고 직무대행체제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남아 있던 이사들을 규합한 후, 회장공석 중에 수석부회장, 상임부회장 순으로 이미 기틀이 잡혀있던 정관에 의거 사무총장이 상임부회장을 겸임하도록 이사회의 의결을 보았다. 그래서 사무총장인 내가 상임부회장을 겸하면서, 공석 중인 회장이 선임될 때까지 그 직무대행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대외적으로 국제불교회보를 통해 이를 공지하였다. 이사장에는 김성수, 상임이사에는 김길태로 하고, 임원보강을 위해 동지규합에 머리를 맞대고 힘을 기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세경 회장이 KBS사장에서 물러난 뒤, 80년 8월부터 본인의 사의(구술)표명으로 국제불교도협의회는 회장이 공석 중인데, 이후 회장직무대행을 월권행위로 투서하여 문공부 감사과에서 그 진상을 조사하고자 했다. 그간 나의 국제불교도협의회 회장직무대행체제 업무가 합법성인가를 묻는 확인진술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른 전말(진술)보고를 통해 그간의 모든 업무진행이 적법성으로 무탈허출한 입장임을 아울러 판명했던 때다.

그 뒤 회장 천거에 문호를 열고 있던 중이어서, 일일이 누구라고는 밝힐 수 없지만, 어쨌든 신군부에 배경을 둔 이와 연을 이으려는 분도 있었고, 정계에 몸담아 왔던 분 중 참신한 불자, 또는 재계에 몸담고 있는 유력한 불자를 찾자는 둥 여러 각도의 분석으로, 뚜렷한 대책은 잡히지 않고 오히려 골머리만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었다. 시국이 뒤숭숭하니 덩달아 인맥을 찾는데도 난감했던 때다.

이때에 소문은 돌고, 나를 위해 위로를 겸해 충고하는 분이 계셨다. 물론 이분에 대해 누구라고 밝히기엔 그 당시 별정공무원 신분인지라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을 듯싶다. 회장선임에 신중을 기하라는 것, 그리고 국제불교도협의회 임직에서 완전히 떠나있질 말라 하신다. 무슨 뜻이었을까. 그것은 내가 떠나면 곧바로 국제불교도협의회는 등록취소를 당한다는 것. 나의 의지와 생각을 바르게 보고 존중해서 믿고, 지금까지 국제불교도협의회가 보호되어 왔다는 것이다.

<도안스님께 건네준, 연합건축(김만성)에 의해 그려낸 LA불교문화원-설계구도의 산중사찰 상상 조감도>

이럭저럭 시간은 흐르고, 도안스님이 LA불교문화원 건립위원회 한국지부 결성을 위해 1981년 3월 31일 일시귀국해서 나를 만나고 있던 때다. 1981년 4월 10일 칠보사에서 LA불교문화회관건립 자문위원회 결성을 위해 분주히 각계 인사들을 접촉하셨다. 그때에 스님은 작년부터 연합건축(김만성)을 통해 미리 부탁해 놓은 LA불교문화원-설계구도의 산중사찰 상상 조감도를, 그때에 찾아오라 하시어 완성된 것을 도안스님께 건네주게 된 때였다. 도안스님은 조감도를 갖고서 학계, 언론계, 문화계, 종교계 원로들로 구성한 칠보사 연석회담에 오신 조명기, 이종익, 윤임술, 박완일, 홍윤식, 황경석, 강영숙 외 외부원로와 종단대표가 합석한 자리에서 건립계획안을 설명하셨다고 했다. 그리고서 도안스님은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셨던 때다.

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1대에 이어 3월 3일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연장선상의 제5공화국을 이끌던 때로, 03.14「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법」공포와 04.07「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법시행령」공포로-평통사무처 창설이 된 후 그 일로 나의 외사촌(강영복)형님이 총무처에서 평통자문회의 사무처 운영국장으로 옮겨 있었던 것을 알고, 그때 나는 해외평통위원에 도안스님을 반드시 배정, 빠뜨리지 말고 위촉해 놓을 것을 요청했었다. 그래서 실은 그때로부터 도안스님은 해외(LA)평통위원에 있게 된 연유가 된다.

그리고 4월 중순경 느닷없이 총무원 사회부 장무익 과장님이 나를 찾아 오셨다. 작년 제9회 불교미술전람회(80년 10월 22일부터 11월 4일까지 총무원불교회관)에서 최고상(종정상)을 수상한 11면 관세음보살상 작가들의 딱한 사정을 알린 것이다. 이 작품을 모셔갈 곳이 없어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작가 2인(공동작품)에게 100만원 상금밖에 못주고 있는데, 제작비가 200만원이 들어갔다 했다. 각 종단사찰 어느 곳이든 1,000만원에 가져갈 곳만 있으면 찾아 알선해 달라는 것이었다. 난감한 입장이 됐다. 큰 사찰이 나서서 불사를 하는 곳이 아니라면, 내가 어디에서 그런 곳을 찾을 수 있겠으며, 그 당시 1,000만원을 어느 사찰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싶다. 어쨌든 작가를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그래서 작가 김홍복씨가 찾아왔기에 거두절미하고 내가 추천하는 곳에 기증할 수 있겠느냐 했다. 눈이 휘둥그레지며 한참동안 물끄러미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디인데요. 미국이다. LA한국불교문화회관에 기증하는 것이다. 어차피 그곳에 갈려면 이운식을 해야 한다. 스님이 나오셔서 조계사법당에서 이운식을 하고 모셔가도록 조치하겠다. 내 방법은 이것뿐이니, 돌아가서 잘 생각해 보세요. 이같이 상담하고 헤어졌는데 그 뒤 답변이 그렇게 하겠다고 응답을 했고, 곧바로 내게 와서 기증서류를 작성해 놓고 돌아간 듯하다. 그래서 미국에다 도안스님께 전화로 알리고, 일정을 잡아 이운식을 하고 모셔가라고 했다.

이때에 LA관음사 81년은 무슨 일을 해왔나 살펴보기로 한다.(관음사 20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간추린다.)

1981년 3월 31일 문화원 건립위원회 한국지부 결성을 위해 도안스님 본국에 일시귀국

1981년 4월 10일 한국 칠보사에서 LA불교문화회관건립 자문위원회를 결성- 학계, 언론계, 문화계, 종교계 원로들로 구성 - 연석간담회에서 조명기, 이종익, 윤임술, 박완일, 홍윤식, 황경석, 강영숙 외 외부원로와 종단대표가 합석한 자리에서 건립계획안-조감도를 보이며 설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