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갑사에서

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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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목) 06 16, 2016 12:03 pm

추갑사에서

전체글글쓴이: lomerica » (일) 11 20, 2016 12:54 pm

오전에 대전에서 불자의 혼례다 다녀와
오후 한시경 계룡산 갑사로 갔습니다.

영규대사와 관련한 포럼이 있다 하여서입니다.

시작 시간 전에 도착을 하였기에
표충원에 들러 영규대사 비석을 찍고
서산영규 사명대사 전에 예배하였습니다.

대사의 비석을 건립하게 된 사연은
원효사 카페에 원고지로 쓴 건립 내역에서 나오듯
영규대사현창회 지상준 회장과 여러 지사들이
중앙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여
대사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운 것입니다.

세운 분들 명단을 보니 지상준 권선옥 곽상남
이진철 이관용 이복문 이용주 정주상 조태복 등
당시에 활약했던 몇몇분들 이름이 나옵니다.

사무실에 들러 비문을 탁본 것이 있는지
아니면 비문을 인쇄한 내용이라도 있는지 물으니
현재 그런 것이 없고 다음에 계획하고 있다합니다.

비문은 위당 정인보선생이 지은 것이기에
여러가지 참조가 될만한 내용이 있으리라 여겨지는데
한문으로 되어 있으니 일반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입니다.

나라도 시간을 내보려 사진을 찍었는데
일단 원문을 적고 번역본을 만들어 보렵니다.

갑사에는 보물이 많기로 유명하고
춘마곡 추갑사라는 말처럼 가을 정취가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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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_1213.jpg (360.28 KiB) 47 번째 조회

그중에 살아있는 보배가 한분 계시니
윤월스님이라는 여든 넷 되신 노장님이십니다.

이 어른은 대불련 초창기 멤버로
한양대학교 재학 2학년 때 대불련을 접수시키니
교수처에서 여덟번을 퇴짜를 놓더랍니다.

총장의 종교가 불교와는 달랐던게지요.

아홉번째는 접수시키면서 이번에도 안되면
자퇴하겠다 하니 총장과 면담이 잡히는데
총장은 아흔여덟명의 창립 발기인 명단을 보며
불교는 용두사미라서 등록을 안받아 주려 했는데
자퇴까지 하겠다 하는 소리에 등록을 받되
6개월이 지나도록 인원이 늘지 않고 줄면
자진 해산하라 각서를 쓰라 하더랍니다.

좋다 그렇게 하겠다 해서 5월에 창립법회를 하며
홍정식 법사를 초청하여 법회를 여니 70여명의 회원이 나와
창립법회를 잘 하였고 이후 두어달여 회원이 늘어
2학기 개갑법회 이후 이백여명이 넘는 불자들이 모여
그뒤로 한양대학교의 불교학생회 전통이 시작되었으며
63년도에 비로소 전국에 대학생 불교연합회가
이루어 지는데 큰 역할을 하셨다 하는 분입니다.

지금도 대불련 동문 모임에 참석을 하시는데
참으로 오십여년 전에 그런 비화가 있었던 것을
누가 알고 말하고 기록으로 남길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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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_1183.jpg (210.31 KiB) 47 번째 조회

두시에 포럼이 시작되었는데
발제자로 나선 이도흠교수의 발표와
토론자들의 토론및 질의 대답이 이어졌습니다.

다들 명색이 교수요 박사요 불자요 하는 이들이라
말을 어찌 그리 잘하고 언변이 좋은지 불교계의 보물입니다.

하지만 발제자의 발표문 내용에
영규대사가 자발적으로 승병을 조직하지 않고
허욱이라는 공주목사의 지시가 있었으며
처음엔 불살생 계를 이유로 거절하다가
나중에 받아들여서 승병이 만들어 졌다는 내용은
당시의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내용임에도
그것이 일부 문헌에 그렇게 나온다는 문구 하나로
영규대사의 거병과 전쟁에 참여한 단초가 되는양
마치 사회적 분노라는 이름으로 재단되고 있음입니다.

내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영규대사는 갑사에 입산하여 수도하면서
부목처사 역할을 하는 낮은 자리였다 하나
청허당 서산대사의 고제로 알려졌고
난리중에 800여 의승병을 이끌고 전투를 지휘할만큼
뛰어난 지략과 용맹을 지녔던 분으로
아마도 지역의 명망있는 대사였을 것이며
임진란 이전부터 조헌과 교유가 있었을 것이라
감히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헌은 임진란 이전인
1586년에 공주에 계수제독관으로 부임해
지역 행정관으로 근무하였으며
이후 왜의 빈번한 침략 야욕을 살피며
왜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 경계해야 한다
선조에게 지부상소持斧上疏를 하는 등
여러번의 노력을 하였던바 공주에 있을 때 이미
갑사에 주석하던 영규대사와 교유하면서
의기가 맞아 미리 임란에 대비한
힘을 비축하자는데 의견을 모았을 것입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영규대사는
조헌과 더불어 난리를 대비하면서
반포 공암굴에 있건 고청 서기를 찾아가
대비책을 마련하는 등 1592년 이전부터
난리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였을 것이고
난리가 나서 선조가 의주로 도망을 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자 준비한 계획을 실천하면서
승병 800명을 규합하고 옥천에서 의병을 모은 조헌과
연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임에도 불구하고
허욱이라는 이의 권유에 마지못해
승병을 이끈 것이 되었으니 본래의 대사의 뜻과는
천지현격한 발표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선조실록에는 허욱이 등장하지 않다가
선조수정실록에 갑자기 허욱이 대사에게
승병을 구합하도록 시킨 것처럼 나오는 것은
첫 승전보를 전했던 대사는 돌아가고
나머지 도망치던 관리들이 전쟁이 끝난 뒤에
논공행상을 논하는 과정에서
마치 자기가 공을 세운 양 말한 것이
그대로 기록된 것이 아닐까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듭니다.

결국 발제자의 주장으로 보면
영규대사의 충절의 의지와 거병이
남이 시킨 것을 마지 못해 따른 것으로 되어 버리니
이는 전도몽상 중에 전도몽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되었던 영규대사의 전쟁 참여가
사회적 분노냐 를 놓고 갑론을박 하는 것은
상당히 시의적절한 주제라고 이구동성 하였지만
대사의 충절은 중생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한
유마거사같은 구세대비의 한 방편이었을 뿐
거기에 사회적 분노 운운하는 것은
견강부회적인 성격이 많은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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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_1214.jpg (194.52 KiB) 47 번째 조회

네명의 교수에게 대사 묘소에 가보았느냐 묻고
가보지 않았다 하기에 불과 20분 거리에 있으니
기왕에공주에 내려 왔을 때 꼭 들러 가시라 하였습니다.

좋은 발표를 듣기는 들었는데
영규대사는 도외시하고 변죽만 울리다 만 느낌이라
한참 무언가에 대하여 말을 나눴는데
정작 무언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런 심정입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일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열심히 노력하여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기를 기대한다 하였습니다.

예정보다 늦은 바람에 시내로 나와서
김미경교수 스토리텔링 공간 사무실 개소식에
얼굴만 빼꼼하니 내밀고 나서
공주 예총에서 진행하는 행사를 참여하고
절에 오니 하루가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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