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 천도에 숨은 이야기

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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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목) 06 16, 2016 12:03 pm

웅진 천도에 숨은 이야기

전체글글쓴이: lomerica » (화) 11 01, 2016 2:22 pm

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의 급습으로 돌아가고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22대 문주왕입니다.

우리는 문주왕이 위례에서 웅진으로
바로 천도해 온 것으로 알기 쉬운데
웅진 천도 이전에 숨은 이야기가 있어 소개합니다.

문주왕은 난을 피하면서 국력을 길러
권토중래할 계획으로 충주의 계족산으로 갑니다.

계족산에 올라 내려다 보이는 충주의 지세가
한강과 달천강에 옹위된 듯 보여 도읍지로 좋아보여
신료들과 더불어 새 도읍지 이름을
소경小京이라 하기로 정합니다.

새도읍지 역사를 시작하기로 하고 나니
전국에 있는 이름있는 목공이나 석공등 장인들이
하나 둘 충주로 모여들고 왕 역시 잔솔밭에
장막을 두르고 가행궁으로 삼아 궁성 재건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됩니다.

만리재 넘어 울창한 송림과 갈매기들 일대에
연장소리가 울려퍼지면서 충주 사람들은
백제의 수도가 설치된다는 기대감에 마냥 부풀어
자진하여 일을 돕는 등 긍지가 넘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행궁에서 잠을 자며
공사 진척을 감독하던 왕의 꿈에
흰 도포를 입고 백발에 수염이 길다란
스물한명의 선인들이 찾아 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선인이 말하기를
여기는 백제의 새 왕도 자리가 아니다.

여기서 남서쪽으로 향해 가면
백강이 둘러 싼 고마나루가 있는데
그곳에 궁성의 주초를 세움이 마땅하리라
하면서 자신은 백제의 시조라 일러 주고는
문주왕을 격려하고 사라집니다.

문주왕은 꿈에서 깨어나 가만히 생각하니
스물한명의 선인들은 자기가 스물두번째 왕인 까닭에
선조들이 분명해 보이고 선조들이 감응하여
새로운 도읍지를 일러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침내 신하들을 웅진으로 보내
고마나루 주변을 살펴보고 왕도로써 적당하다
는 보고를 받고 충주의 궁성 축조를 미루어두고
웅진으로 천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공주에 왕성이 있었던 자리로
공산성 과 봉황산 자락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문주왕의 꿈에서 본 선인들의 지적처럼
고마나루의 크나큰 벌판이 웅진 백제 문주왕 시절의
궁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훗날 자연재해나 백제의 멸망으로
그 흔적과 자취가 사라졌는지는 몰라도
고마나루를 건너가면 우성면에
성의 머리라 불리는 성머리가 있고
정방뜰이라 불리우는 지명도 있으며
장자못의 전설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은 허허벌판에 가까운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천오백여년 전에는 궁성이 자리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잠시 왕도의 꿈을 꾸었던
계족산 아래 벌판은 적막으로 돌아가고
들판에는 왕궁의 주초석들만 남게 되었으며
후세에 사람들은 왕이 납시어
장막을 치고 가행궁을 차렸던 자리라 하여
어림御林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전합니다.

이것은 충청북도 전설지 1982년에 실린 내용입니다.

위 내용으로 본다면 앞으로 충주는
대한민국의 중심도시로서 중원의 역할을 할 날만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475년(개로왕 21) 백제의 수도를
위례성에서 충주로 천도하기 위해 공사를 하던 중
고구려의 침략을 당하여
문주왕(文周王)이 웅진(공주)으로 옮겼다고 전해지며,
궁전건립지로 알려진 어림리(御林里)가 이곳에 있다."
이상 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충주의 계족산은
지금 이름을 바꿔 계명산이라 부른다는데
계족산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개명 이유가 이렇답니다.

충주가 백제의 영토였을 때 지금의 심항산 기슭에는 오동나무 숲이 무성했고, 숲속에는 지네가 많이 서식했다고 한다. 지네들은 오가는 사람들에게 적잖은 위협이 되고 있었다. 어느 날 마고성주(금봉산성)의 딸이 심항산 기슭 약막 근처를 지나오다 독이 오른 커다란 지네에게 물리고 말았다. 딸의 몸은 금세 지네의 독이 퍼져 전신이 부어 올랐다. 성주는 인근 고을의 이름난 모든 의생들을 불러들여 공주의 몸이 하루 빨리 완치되도록 손을 쓰게 했다. 그러나 공주는 쉽사리 낫지를 않고 날이 갈수록 점점 악화가 되더니 마침내 이레가 되던 날 저녁, 불행하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애지중지하던 딸을 졸지에 잃게 된 성주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이 컸다. 성주는 딸을 잃은 한을 달래며, 또 다른 백성의 피해가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사람들을 동원하여 지네를 잡게 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지네는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네는 줄어들지 않고 더욱 늘어나기만 했다. 이에 성주는 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천재라고 생각하고, 하늘의 힘을 빌어 씨를 말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

그리하여 영험한 산신에게 호소하기로 하고 심항산 정상에 제단을 마련하고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렸다. 그랬더니 비몽사몽간에 용머리를 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 닭과 지네는 상극이니 산에 닭을 놓아먹이도록 하여라. 그렇게 하면 지네는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라고 말하며 홀연히 사라졌다.

신령의 계시를 받은 성주가 크게 깨닫고는 온 백성들에게 닭을 방목하게 했다. 닭들은 지네굴을 헤집고 지네를 끄집어내서 부리고 사정없이 쪼아먹었다. 그리하여 얼마 가지 않아 심항산에서는 지네가 사라졌다. 이런 연유로 계족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정상에서 산세를 살펴보면 산의 형세가 흡사 닭의 발가락 모양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계족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계족산과 관련하여 내려오는 또 다른 전설은 견훤과 관계가 있다. 후삼국 시대에 충주 사람들은 후백제의 견훤이 포악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군사들이 충주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산의 이름을 계족산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견훤의 탄생 설화를 보면 지렁이가 처녀과 동침을 해서 아기를 낳았는데 그가 견훤이라는 설이다. 닭은 습성상 다리로 땅을 파헤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땅속에 숨어있던 지렁이가 밖으로 나오게 되고, 그러면 지렁이는 당연히 닭에게 먹히게 된다는 이치를 들어 견훤의 침범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계족산은 또 다른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1958년 충주시에서 여명을 알리는 뜻의 계명산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계족산이 닭발 형상이고, 닭발은 모은다는 의미보다는 파헤쳐 흩뜨러 버리는 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충주에는 큰 부자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상 바람에 실려온 바람 카페에서 옮김-

그러고 보니 대전에도 계족산이 있고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미륵부처가 올때까지
선정에 들어 계신 가섭존자가 머무는 곳 이름도
계족산입니다.

또 미륵이 하생해 오실 때가 되었는지
나라를 농단한 사람들이 지은 이름도 미르(용)이고.

아 역사와 전설은 무엇인지..

오늘은 공산성 앞에 지원금을 받아
한옥 건축물 두동을 짓는 노사장에게서 연락이 와
내려 가서 상량문을 적어 주고 왔답니다.

어찌되었든 공주도 발전하고
나라도 평화로웠으면 하는 바램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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