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에 대한 인식보다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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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에 대한 인식보다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전체글글쓴이: lomerica » (목) 02 09, 2017 6:09 am

공업에 대한 인식보다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릴레이 기고] 공업에 대하여 / 김형남 변호사 2015년 02월 04일

고려말 왕조와 귀족 그리고 그들과 결탁한 승려들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부패와 타락은 결국 그들을 몰락시키고, 그들의 자리를 염치와 예의를 강조하는 성리학과 사대부들에게 내주었습니다.

공리와 영욕을 초탈하고, 절의를 생명처럼 지켜 산림에 은거하며, 조선 초 조정의 자리를 청하는 태종에게 신절(信節)을 지켜 풍교를 세울 수 있도록 해달라며 거절한 성리학자 야은 길재의 정신은 관직에 나아간 사대부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쳐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이 목민의 바탕이 되게 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작가 최인호는 자신의 40년 작가 인생을 정리한 수상록 문장에서 “부끄러움은 인간만이 가진 최고의 덕목이다. 딸아이가 부끄러워할 때 간혹 낯을 붉히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낯을 붉히지 못하는 내 자신의 쇠가죽만큼 두터워진 낯가죽이 부끄럽다”라고 부끄러워 낯을 붉히는 딸아이의 모습을 최고의 스승으로 삼은 자신의 경험을 격언으로 만들었습니다.

기독교의 최초 전파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는 “수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라고 하였고, 원불교의 창시자 박중빈은 “세상에서 세 가지 제도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나니, 하나는 마음에 어른이 없는 사람이요, 둘은 모든 일에 염치가 없는 사람이요, 셋은 악을 범하고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는 사람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맹자의 본성론인 성선설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 지를 차지하고서라도, 염치 혹은 부끄러움은 지금껏 인간다움의 근본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주어왔습니다. \n\n벌써 봄기운 곳곳에서 배어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굳이 다른 종교, 문필가 그리고 역사 얘기를 언급한 까닭은 우리 옷장에서 겨우내 개어 놓았던 지난 옷을 꺼내 입듯이, 마음 속 켜켜이 챙겨두었던 부끄러움이란 옷을 꺼내 입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현재 이 나라는 거시적 진단만 난무하고 해결책이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적폐(積幣)’, ‘관피아’, ‘국기문란’, ‘국민의 이해부족’ 등 위정자들은 이 사회의 문제점을 쏟아내고 있으나, 국민들은 항상 되묻습니다. “그런데 뭘?”

마치 일기를 3자적 관점에서 쓴 것처럼 책임져야할 자의 말에 주어가 없으니 진실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국민들은 이를 유체이탈화법이라고 조롱합니다.

조계종의 자성과 쇄신결사 본부장인 도법 스님께서는 출가자의 범계행위와 근래 부쩍 심해지고 있는 세속주의 경향마저도 공업(共業)에서 비롯된 것으로 공동체에 책임을 묻고 공업으로 해결해야 된다고 합니다.
총무원장 스님은 어려서는 절 뺏으러 다니고, 커서는 종단 정치하느라 중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는 나름 솔직한 고백도, 승려의 세속화에 대한 공동체 전체 책임론을 인증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승 스님의 중(현재의 스님들)이 중으로서의 정신이 없다는 말씀이나 도법 스님의 종단의 호법기능을 담당하는 스님들의 자질이 너무도 낮기 때문에 지엽말단적인 상황(출가자의 범계행위나 폭력 또는 이에 대한 종단의 미온적 태도)에 매몰되지 말자는 말씀은 공업에서 더 나아가 숙명론의 비장함마저 느껴집니다.
자성과 쇄신을 하겠다는 것도 책임을 지겠다는 것도 총무원장 스님과 도법 스님이었습니다.

자성과 쇄신 결사 3년 동안 아무것도 해결된 것도 없고 더 나빠져만 가는 상황을, 공동체 전체 책임론과 승려 자질론으로 전가시키려하는 것은 현재 위정자들의 무책임함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염치를 모르는 권력자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진실에 대해 무지하게 만들고자 하고, 이에 부역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잔머리를 굴려 일시적으로 현실을 권력자들에게 유리하도록 조작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악순환의 눈덩이를 더욱 증폭시키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총무원장 스님은 2012년 초경 자성과 쇄신 결사본부를 만들었고, 도법스님은 그 결사본부장에 취임하였으며, 국가에 기댐 없이 내부의 자정을 통하여 자립하며, 사회를 변화시켜나가자고 하였습니다.

2012년 중반 자성과 쇄신 결사 본부는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종단 출가자는 수행·교화, 재가자는 운영·신행 담당 체계 확립 ▷올바른 불교관 확립을 통한 종도 의식개혁 ▷사부대중공동체 체계 확립 ▷소욕지족의 생활문화 제도화·생활화 ▷중앙종회의 종책모임(계파) 해산 ▷한국불교 백년대계의 종헌종법 완성을 결의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중앙종회를 압박하여 전혀 개혁적이지도 않고(사찰운영위원을 주지가 임명하고, 1. 인등비, 월정 헌공금 등 정기 기도금 2. 출가일, 열반일, 초파일, 우란분절, 성도일, 불교 주요 기념일 기도비 3. 사찰 주요 불사 시주금 4. 사찰에서 시행하는 목적사업에 소요되는 비용 등에 대하여 꼬박 일정금액 이상을 시주해야 사찰운영위원의 자격이 있는 사찰운영위원회법, 주지가 관리감독하는 종무원인 사찰회계책임자를 둔다는 사찰예산회계법 등) 실현가능성이 없는 종법 몇 개를 만들어냈을 뿐입니다.

재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던 자승 스님은 총무원장 등 종무원들의 선거관여를 금지시키는 획기적인 입법이라는 선거법을 통과시키고서는 본사주지 등 종무원을 총동원하여 줄 세우기의 완결판인 불교광장을 만들고, 도법 스님은 자성과 쇄신 결사본부와 불교시민단체를 동원하여 선거제도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추대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주장하고, 결국 자승 스님은 자성과 쇄신에 대한 평가도 받지 아니하고 총무원장에 재임합니다.

자성과 쇄신 결사본부는 선거 직전 발생한 적광사미 폭력사건에 대하여 완전히 눈을 감아버리고, 선거기간 도법 스님을 선호하는 측에는 재임이후 도법 스님을 전폭적으로 밀어주겠다는, 도법 스님을 경원하는 측에는 도법 스님에게 믿고 맡겼더니 자기 세계만 추구하더라 이제부터는 자승 스님이 직접 개혁을 밀고 나가겠다는 도법 스님에 대한 양분적인 존재론이 선거를 도왔습니다.
재임이후 직영사찰 봉은사를 파벌의 맹주가 차지하고 계파독식이 심해지고, 어른들이 농락당하며, 총무원장의 상좌들을 포함하여 범계행위 풍토가 완전히 자리 잡는 경향을 보이자 이제는 공업의 깃발 아래 동시에 숨어버리고 있습니다.
일견 두 분들은 일단의 집단을 점점 튼튼하게 엮고 있고, 확실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지도자가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대중은 결코 지도자를 신뢰하고 믿고 맡기지를 않습니다.
100인 대중공사 아니 모든 사방승가와 사부대중을 모아 놓고 결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부끄러움을 아는 지도자의 모습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중아함 참괴경에 보면 사리불이 “수행자에게 부끄러움이 있으면 사랑과 공경을 익히게 되고……바른 견해, 무욕을 익히게 된다. 무욕을 익히면 바른 해탈과 열반을 익히게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들은 먼저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해탈과 열반의 첫걸음이니라.”라고 설한 대목이 나옵니다.
그리고 반대로 부끄러움을 잃게 되면 “모든 것을 잃고 상처를 입게 된다”고 설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유교경에서 입적하시기 직전 다음과 같이 말하셨습니다.
“부끄러워할 줄 알아라. 부끄러움의 옷은 모든 장식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쇠갈퀴와 같아 사람의 법답지 못함을 다스린다. 그러므로 항상 부끄러워할 줄 알고 잠시도 그 생각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만일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버린다면 모든 공덕을 잃게 될 것이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은 곧 착한 법을 가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다시 우리 역사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성리학이 조선의 국교가 되고 이백년이 흐른 율곡의 시대에 길재의 후손들이었던 사림들은 염치를 잃어버리고 백성을 돌보기보다는, 예학논쟁, 당쟁으로 날밤을 지세우고 문화를 독점하여 민중의 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진경산수화에 빠져듭니다.

당시 백성들은 몸에 절절한 추위와 굶주림에 못 이겨 본의 아니게 염치를 돌아보지 못하고 일어나 도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무기력한 정권의 모습을 목격한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켜 정권까지 직접적인 목표로 합니다.

도법 스님은 지엽말단적인 것보다는 전체(사회통합을 통한 의식개혁을)를 보고 대중공사를 통하여 뜻을 모으자고 합니다.
쌍용차 해고자 복직을 위한 활동 등 대사회적 메시지 전달이 결코 의미 없는 활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성과 쇄신의 본래 약속인 내부 자정 없이 하는 활동은 마치 문화를 독점한 양반들이 즐긴 조선중기의 진경산수화를 보는 듯합니다.
죽기 직전의 나무에는 더욱 화려하고 튼실한 꽃과 열매가 열립니다만 이는 허무할 뿐입니다.
도법 스님은 내부적 자정은 제켜두고, 전국을 돌며 국민들에게 공허한 방편뿐인 내용을 들고 화쟁을 가르치려 들고 있습니다.
중생의 아픔을 이해하고 중생으로부터 배우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스스로의 탁마가 무엇보다 필요한데, 이것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운동이든지 성과가 지도자에게 머물면 안 되고, 대중들에게 회향되어야 하는 것이거늘 늘 지도자만 성과를 독점하는 운동은 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깨달음을 얻기에는 너무도 어렵고 버리지도 못하였기에 권력에 집착하는 일부 권승들과 자정을 포기하고 외부로 도는 도법 스님 내지는 그 추종하는 분들 사이에 부끄러움을 못 느끼는 것에 차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우리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자성과 쇄신의 근본은 지금까지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모든 것을 제자리에 자리매김 시키려는 노력이 되어야 합니다.
수행자의 부끄러움은 일반 재가자의 부끄러움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탁발과 재가자들이 보시에 의하여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수행자는 보시 받을 자격을 갖추어야 하고, 그 자격은 오로지 지계(持戒)에 의해 부여됩니다.
따라서 율장과 종법대로 종단이 운영되도록 하고 자신의 지계를 점검하는 것이 제1 순위의 일입니다.

두 번째는 세속화와 물신주의에 대응하기 위하여 기득권층부터 기득권을 내려놓도록 하고, 공익적인 자금을 만들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사찰 등 종단의 공적 기관을 공사구별이 철저한 청명한 사람들에게 맡겨야 하고 범계행위에 대해 철저한 처벌이 따라야 합니다.
네 번째는 자성과 쇄신 결사가 만든 각 의제들에 대하여 그 실천 내용을 점검하고 그 실천이 미흡하다면 마땅히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지금에 와서 공업을 주장하고 전체 책임론으로 돌린다면 출가자들의 더 이상의 세속화를 막아야할 중요한 시기에 영원히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면서, 연명하겠다는 얘기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n\n그리고 일단의 집단에서 점점 고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100인 대중공사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희종 교수나 김종규 변호사와 같이 바깥에서 떠드는 사람들은 초가삼간을 태우려는 자들이고 100인 대중공사는 진정한 개혁을 추구하자는 것이다”라는 100인 대중공사 자리에서 한 위원이 말한 소회처럼 이들은 주류세계에서 이탈된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을 진정으로 바꾸고자 하는 자들은 주류세계에서 일탈하여 불만스런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들이 몸담아 살고 있는 현실의 위기를 끊임없는 사유의 자양분으로 삼아 부끄러움의 감각을 형성하고 이를 전달하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여야 합니다.
그들이 밖으로 나아가 만날 사람들은 결코 현 집권세력과 대척점에 있는 승려들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을 만나 민중의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올바름에 대한 감각과 부끄러움에 대한 감각을 전달하여야 합니다.
쓸데없이 많이 배운 것도, 쓸데없이 건강한 것도, 실천 없는 많은 지식들을 갖은 것도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현재 이들은 잔머리를 굴려 일시적으로 현실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조작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로 악순환의 눈덩이를 더욱 증폭시키는 데 일조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보다는 자유로운 걸음걸이로 차라리 무리로부터 고립되어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것이고, 거짓이 난무한 지금의 상황에서 밖으로 나아가 재가자들의 뜻을 모으는 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것입니다.

대한불교청년회 주체로 토론회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불교청년회가 서야할 자리는 그러한 중간자적 자리가 아닙니다. 그간 종단이 설정한 의제와 성과에 대하여 비판의 날을 누구보다도 세워야할 대한불교청년회가 양진영을 만들어 놓고 토론의 중간지점에 서있다는 것은 전혀 어울리는 자리가 아닙니다.
제 자신 무엇보다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지점입니다.
1980년대 민중불교운동을 시작할 당시에 공업이란 말은 가장 실천적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종단의 상황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실천적 행동을 보여주자는, 잠자는 부끄러움을 깨우기 위한 가장 실천적 개념이 공업이었습니다.

책임져야 할 자가 그 책임을 회피하고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것에 사용되는 공업논리 밑에서 대한불교청년회가 잠자고 있는 모습은 그 책임자의 한사람으로써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현실을 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상념에 빠져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다고 하는 것은 생각의 게으름일 뿐이고, 그러한 상념에서 나온 대안이나 청사진은 게으른 자의 백일몽에 불과합니다.

끝으로, 앞으로 외로운 길을 가야할 재가자들에게 한 말씀 올립니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나, 외로운 결단을 내려야할 때 항상 숫타니파타에서 나오는 글을 떠올립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때마다 저 구절이 자유롭게 지혜를 찾아 집착을 버리고 간다든가,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라든가, 비난과 칭찬에 휘둘리는 엉킨 일상을 벗어나 정진하라든가 하는 의미로 떠오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소의 외로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묵묵히 일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남는 것은 단 하나의 뿔이고, 아무런 바람 없이 부지런히 일하고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뿔을 남기는 무우(無牛)에 자신을 이입하곤 하였습니다.
도법 스님께서는 지난 대한불교청년회 토론회에 개인자격으로 참여하셨다고 하지고, 다른 어떠한 스님들도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논의를 하였음에도 당연히 따라야할 실천이 없고, 책임지는 이도 없으며, 스님들은 비판적인 재가자들과 엮이는 것을 꺼려합니다.
현재 종단에 비판적인 스님들조차 공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확인되지 않아 같이 갈 수도 없습니다.

이런 외롭고 고립된 재가자들에게 종단의 현실은 살을 에는 것 같은 바람 부는 들판일 것이고, 그 어떤 쉼터도 보호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가자들은 스스로 선택을 하였고, 그 자리를 고수해 스스로의 보호처를 자기 힘으로 만들고자 하고 있고, 그럼으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이 부끄러움을 아는 진정한 정치가이자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누구는 붓다로 살자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살자는 얘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과거 개혁을 꿈꾸는 불자들은 부처님 법을 제대로 공부하고, 법대로 수행하며, 법대로 원융살림을 살며, 법을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던 바, 이는 그대로 출가수행자의 본분이고, 다시금의 재가자들이 유일한 등불로 삼아야할 목표입니다.
그리고 재가자들은 출가사문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하는 데 있어서 부끄러움을 느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한불교청년회 대의원의장 변호사 김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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