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의 문제점과 개혁안(3)

lomerica
전체글COLON 275
가입일COLON (목) 06 16, 2016 12:03 pm

한국 불교의 문제점과 개혁안(3)

전체글글쓴이: lomerica » (화) 02 07, 2017 11:39 am

한국 불교의 문제점과 개혁안(3)

img_11722.jpg
img_11722.jpg (24.48 KiB) 38 번째 조회

만초스님 (울산 해남사 주지, 청정승가를 위한 대중결사 의장)

토론에 부쳐

얼마전 우리절에서 불자들을 위한 초청법회를 개최하고 주변지역의 스님을 법사로 초청한 일이 있었다. 초청되신 스님이 한 신도들을 위한 법문의 내용은 그날의 요청 주제와 상관없이 불자들이 각성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현재의 한국 불교는 위기의 상황을 맞고 있고 불자들이 각성하지 않으면 십년내에 한국의 불교는 문화재로서만 의미가 있거나 역사교과서 또는 철학 수업시간에만 의미있는 종교로 전락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강의를 듣는 내내 주지인 나로서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그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신도들은 소비자와 같다. 그들이 선택한 불교라는 종교는 부모가 믿었기 때문이라거나 어릴 적에 절에서 비빔밥을 먹은 인연이 지중해서 불교를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을 염원해서 방법을 찾다가 여러 종교 가운데 불교라는 종교를 선택한 소비자와 같은 입장에 있다.

그들은 불교에 갚아야 할 빚이 있거나 불교를 위해 짊어져야 할 의무가 있는 이들이 아니다. 그리고 스님들은 그 불교를 선택하도록 불교라는 상품을 소개하고 불교의 우수성을 자랑해서 아직 구매의사가 결정되지 않은 소비자들에게 불교를 선택하도록 선전하고, 아울러 불교를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탁월한 선택을 했다는 긍지를 가지도록 불교의 상품을 업그레이드 하여 불교라는 상품으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야 하는 입장에 있다.

그런데 그날 불자들을 위한 법문의 내용은 정말 주지인 나를 긴장시키는 내용으로서 불교라는 상품이 무언가 문제가 있고 이대로라면 십년 이내에 용도 폐기되거나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상품이 될 것이라는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n불교의 미래에 대해서 절망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많아도 누구도 희망을 말하는 이들이 없다. 이는 불교의 현실에 불만족스러워하는 일부 불교 신자들만의 목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포교 현장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도심 사찰 스님들도 마찬가지이고, 심지어는 불교 현실에서 조금 물러나 있는 수좌스님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스님들 가운데 어느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어도 불교의 현실이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있고 그 문제의 크기는 불교의 존재여부를 이야기할 만큼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 다종교 사회에서 포교는 그 종교의 존립에 가장 최우선의 조건인데 그 포교 전선에서 있는 스님들의 생각에서 불교에 대한 희망보다는 절망을 이야기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면 정말 불교의 미래는 암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정이 이 지경이 되도록 우리 불교는 이 원인이 무엇이고 이 절망의 원인을 해결해 나갈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지 않고 아직도 방황의 터널속에서 헤메는 듯 하니 종도로서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n최근 불거진 일련의 문제가 촉매가 되어 급작스럽게 자정 또는 쇄신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나, 이 역시 희망속에서 진행되고 있다기 보다 회의와 불신의 분위기가 점점 더 커져가는 상황인 듯 하다. 하기야 최근 논의되는 쇄신 논의가 내부의 자발적 동력을 통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조소와 질타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진행되는 비자발성에 기인하고 있으니, 그 방법이나 결과에 대해서도 적극적 동의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다.

우리 종단에서는 얼마 전 급작스런 쇄신방안을 발표하고 종회에서 법안이 통과까지 진행된 상태라서 일면 이번 쇄신을 통해 우리종단이 거듭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는 분위기가 없지 않으나, 필자가 만난 다수의 종도들은 회의적 시선으로 관망만 하고 있고 또한 상당수는 “잘못은 다른 이가 하고 쇄신 요구는 왜 우리에게 하는가?”라는 불만의 목소리도 상당수 들려오는 실정이다. 따라서 쇄신에 대한 책임을 질 주체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쇄신 분위기 역시 불이 지펴지지 않는 상황임을 숨길수가 없다.

오늘 이 토론회는 이러한 종단의 변화가 절대적으로 요구되어 미룰 수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이 역시 쇄신 주체로부터 얼만큼의 관심을 받을지 필자로서는 자신할 수 없다. \n오늘 고심어린 원고를 통해 발제 해주신 이도흠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그동안의 메아리 없는 외침을 통해 목이 쉬도록 경고와 염려를 해 오셨고, 오늘 다시 이 자리에서 불교와 종단을 위한 소중한 고언을 해 주셨다. 이는 분명 그 경고를 통해 누군가를 비난하고 경책하고자 함이 아니라 불교를 사랑하고 부처님의 교법에 대한 신뢰의 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오늘 발표된 원고 역시 한국불교와 승단에 대한 일방적 지적과 요구가 아니라 현재 한국불교를 오랜동안 지켜본 후 문제를 들춰내고 그 문제에 대해 애정과 이해를 바탕으로 기술되고 있는 점을 발견 할 수 있다.
그동안 종단과 한국불교에 대해 교수님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으로서 그 발제에 대해 문제를 지적하거나 비판적 견해를 가지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오늘의 필자의 토론문은 교수님의 발제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다만 쇄신의 대상이기도 하며 그 주체가 되어야할 종도의 입장에서 현실을 짚는 것으로 역할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발제자의 원고를 살펴보면서 원고의 내용은 지금의 문제를 발생시키는 원인들에 대해 자세한 고찰을 통해 우리가 변화시켜야할 진정한 쇄신이 다만 몇 개의 제도의 보완만으로는 부족함을 나열 하고 있고 그 문제들의 발생은 한 두 해 한 두 명의 잘못된 관행이 아니라, 우리 불교에 오래된 병폐로 자리잡아 아예 관습 속에서 그 문제의식마저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종교 소비자의 입장에서 지적해 주고 있다.

사실 불교 경전의 한문구로 인해 불자들에게 감동을 전하지 못하는 문제는 매번 법당에서 느끼는 문제이지만 법당을 나서면 관습을 바꾸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기복의 문제와 물질적 재화에 대한 승가의 인식 전환(이 문제는 두가지 딜레마가 있다. 불교를 전파하고 수행도량을 운영해야 하는 입장과 또한 최근 요구 되고 있는 다양한 사찰의 지역 활동에도 많은 재원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인식은 불교는 무소유의 종교로서 재정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거나 최소한의 재물만을 지니기를 바라는 입장과 부딪쳐 진다. 물론 너무 과하게 개인이 지니고 있고 그것이 개인의 욕망추구에 사용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지만)과 기복의 문제도 현실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무조건 입시기도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 행위를 멈출 것을 요구하기보다, 보다 건강한 대안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사찰에서의 입시기도는 현재 많은 초심 불자들이 불교에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되고 있으므로 전환이 필요한 부분이다. \n그동안 수없이 지적 되어온 불교의 정권 유착의 문제도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역시 그것이 지니는 역기능과 함께 그것이 지니는 순기능에 대한 편리와 영향력 때문에 쉽게 단절하지 못하는 점이 있으므로 이 부분도 균형과 형평성을 전제로 개선이 필요한 문제이다.

우리 불교는 다종교사회인 한국 사회로부터 사회적 역할과 참여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안타까우면서도 쉽지 않은 현실이다. 대다수의 불교사찰이 인적이 드문 산속을 의지 하고 있고 불자들의 조직화가 미비한 상태에서 다른 종교와 비례하여 그 역할을 요구하기에는 현실적 한계도 있다.
대부분의 스님들이 산속 생활에 익숙한 나머지 세상과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올바른 수행이라 여기는 풍토도 있고 산속 생활의 속성상 분주하고 틀에 짜여진 생활을 감당하기 어려워한다(울산광역시에 불교 사찰 수는 300개가 넘으나 어린이 법회를 하는 사찰 수는 단 5개).

계율의 문제에서도 발제자는 현재의 한국불교 상황을 매우 자세히 인식하고 있으며 스님들의 계율에 대해서도 매우 관용적이며 현실적 인식을 갖고 있다. 발제자가 지적 했듯이 사회가 요구하는 사찰의 역할을 위해서는 불자들과의 직접적 접촉을 위해 때로 노래방 문화나 음식 문화등도 관행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나, 타인의 기준 또는 계율적 기준으로 볼 때는 언제나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이제 토론자의 입장에서 원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현재 종단은 4가지 쇄신안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제도의 보완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이 노력들에 대해 여러 단위의 종도들이 지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지지 속에서 그리고 쇄신 내용을 불신하고 방관하고 있는 대중 속에서 쇄신의 요구는 있으나 쇄신에 대한 의지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려 오지 않는다.

쇄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도가 아니라 쇄신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왜 쇄신이 필요한가? 쇄신의 필요가 “지금의 현상이 문제가 있다”라는 자각 때문에 쇄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자각이 깊지 않다면 아무리 머리를 짜내고 궁리해도 현실성 있는 제도가 생산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의 실효도 기대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실은 쇄신이 먼저 논의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한 솔직한 고민이 먼저여야 한다.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드러나야 그것을 고치고자 하는 적절하고 효율성 있는 처방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쇄신논의는 지금의 문제를 점검하기 보다는 감춰두고 추상적 접근을 한다면 이는 절실하고도 자신의 아픔을 감내해야 할 수 있는 쇄신의 문제를 실현해 갈수 없는 원인이 된다.

두 번째, 지금 논의되는 여러 가지 방안들은 대부분 제도의 개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쇄신은 제도가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런데 쇄신을 이루어가야 할 사람이 쇄신 의지가 없는데 아무리 제도를 만들어 봐야 실효성을 보장 할 수가 없다. 더구나 지금까지처럼 감찰과 호법 기능이 미비하고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종단 현실에선 더욱 그렇다(현재 진행되는 여러 비위들에 대한 징계의 내용들은 공찰 주지에 대한 권한 제한 선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공권 정지 문서 견책 등).
많은 종도들이 사설사암을 소유하고 있고 그에 대한 견제가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공권정지는 무의미하며 오히려 탈 종단 정서, 탈 불교 정서를 유발하기까지 한다. 이런 현실에서의 쇄신은 제도보다는 먼저 종도들의 쇄신의지에 의해서만 성공적인 쇄신이 이루어 질수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지금처럼 종단의 쇄신 발표에 회의적 정서를 지닌 다수의 종도들의 쇄신의지를 일깨우고 동참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감동이 필요하다. 전체 종도가 쇄신의 필요는 공감하고 있지만 자신의 뼈를 깍는 아픔을 감내하고 지금까지의 생활 방식을 전화하여 쇄신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제도 보다는 쇄신에 대한 종도의 공감대가 먼저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종도의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감동이 필요 하다는 말이다.

무엇이 종도들을 감동시켜 쇄신의지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나는 먼저 선배스님들로부터의 모범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 한다. 원로스님 본사주지 종회의원 기타 이미 종단의 기득권을 누렸던 스님들이 모범적인 감동을 제공해 주어야 대중이 따르게 된다. 쇄신안에 대한 불신과 원인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하는 다수의 대중으로부터 쇄신에 대한 동의를 일깨우기 위해서는 선배스님들부터 먼저 쇄신 선언을 이어가야 한다.
제도를 고치겠다고 선언할 것이 아니라 “지금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하겠다”라는 자발적 선언이 바로 대중의 공감과 동의를 이루어 낼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종단의 제도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을 것이다.

타인의 모범이 되어야할 종교인 그리고 수행자에게 있어 제도 법 규정 등은 오히려 수치일 수도 있다. 선배 스님들로부터 보여지는 자발적 쇄신 선언은 전체 종도들의 감동을 일으켜 쇄신이 제도의 보완으로서가 아닌 수행운동으로 확산되어 갈 것이다.
우리가 원로 본사주지 종회의원 총무원 선원 등에서 올바른 쇄신을 이루어 갈 쇄신 선언을 이어 간다면 우린 이제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발적 의지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절망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돌아감:

접속 중인 사용자

이 포럼에 접속 중인 사용자: 1 그리고 손님들 0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