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의 문제점과 개혁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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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의 문제점과 개혁안(1)

전체글글쓴이: lomerica » (화) 02 07, 2017 10:53 am

한국 불교의 문제점과 개혁안(1)
일시: 2556년(2012) 7월 12일, 저녁 7시
장소: 장충동 만해NGO교육센터 대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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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한양대 교수; 정의평화불교연대 사무총장)

한국 불교의 문제점과 개혁안(1)

1. 문제의 제기

지금 한국불교는 위기에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도박 사건 때문만이 아니다. 근대화와 결합하지 못한 채 기복 불교를 고수하거나 2,500여년 전의 교리와 의례를 답습하여 중세시대의 낡은 종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근대화 및 외세와 함께 밀어닥친 기독교의 위세와 공격적 선교에 눌려 정치 사회적 영향력이 저하된 소수종교로 전락하였고, 자본의 위력 앞에 불자 또한 부처님 법대로 살지 못하고 자본의 논리에 함몰되어 있으며, (기독교) 정권의 고도한 종교편향정책에 탄압마저 받고 있다.
종단과 수행자들이 기독교와 자본, 국가의 협공에 제대로 대응하기는커녕 정권과 유착관계를 맺거나 범계행위를 다반사로 행하여 스스로 정당성과 위의威儀, 존재근거를 상실하고 있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게 된 원인은 무슬림의 침략과 탄압만이 아니다. 가장 큰 원인은 평등 가치 구현 등 안티힌두교로서 사회적 기능을 이슬람교에게 넘겨주고, 스님들이 부를 쌓고 성행위 등 범계행위를 자주 행하고 사회적 실천을 등한히 하자 대중과 사원의 후원자들이 다른 종교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1,700여 년 동안 한국의 사상, 문화, 일상생활에 아름다운 기억의 주름을 아로새긴 한국 불교 또한 유사한 상황에 있다. 지금 처절하게 성찰하고 혁신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한국 불교의 승단은 별로 멀지 않은 시간에 대중들의 귀의와 관심으로부터 사라질 수도 있다.
위기는 늘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처절한 성찰과 단호한 파사(破邪)없이 현정(顯正)은 없다. 성찰과 쇄신이 없이 위기는 기회로 바뀌지 않는다. 대다수 불자들이 요새 사용되는 말로 ‘멘붕’에 빠진 지금, 문제점과 원인을 잘 진단하고 과감하게 쇄신하여 21세기에 부합하는 새로운 불교로 거듭나기를 바라면서 몇 가지 문제점과 대안을 문화론의 큰 틀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문화론의 틀에서 분석해야 피상적인 것을 넘어서서 구조적이고 심층적인 원인을 규명할 수 있으며, 쇄신책은 사람, 의식, 제도, 구조와 문화의 개혁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지면관계상 몇 가지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춘다.
기복불교, 재정의 사유화, 국가 및 권력과 유착관계, 범계행위를 중심으로 하되, 이를 중세성, 자본주의, 근대국가 체제, 21세기 디지털 문화라는 틀 속에서 문제점을 살피고 대안을 모색한다.

2. 중세성 및 기복불교의 문제점과 대안

2.1. 중세성과 기복불교의 문제
서양에서 중세를 암흑의 세기와 ‘주술의 정원’으로 만든 가장 큰 요인은 기독교의 전근대성이다. 교황은 신으로 군림하였고, 성직자들은 기독교 교리를 이데올로기화하여 백성을 착취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아 권력과 재산을 독점하였고, 면죄부를 판매하고 마녀사냥을 하고 신의 이름으로 대학살과 전쟁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근대가 열리자 기독교는 기복성 및 주술성과 결별하고 발 빠르게 근대성을 수용하여 현대 종교로 거듭났다. 하지만, 불교는 21세기 오늘에서도 중세의 교리와 의례, 문화를 답습하고 있다. 기독교가 주술의 정원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와 결합하고 과학의 진리와 합리성을 추구하여 현대 종교로 탈바꿈하는 동안 불교는 2천여 년 전의 교리를 그대로 우려먹는 데 급급하였다. 기독교가 현대 학교를 짓고 이곳에 투자하여 인재를 선점할 때, 불교는 사찰내에 안주하며 팔짱만 끼고 있었고 간화선 수행의 절대주의에 빠져 힘들여 강원을 나온 스님들조차 대우하지 않았다. 기독교가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서 민주화 투쟁에 나서며 대중들의 박수를 받을 때, 불교는 군사독재정권을 국가와 동일시하여 호국불교를 외치며 정권에 아부하다가 그 정권과 함께 지탄을 받았다. 기독교가 활발한 실천활동을 통해 인권, 평등, 복지 등 사회적 담론을 생산할 때, 불교는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절집 안에서만 할과 방을 일삼았다. 기독교가 빈민과 소수자를 구제하며 그들과 이에 감동한 대중들을 하나님 품으로 입도선매할 때, 불교는 말로만 대승이지 암자나 선방에서 나홀로 수행하며 고립을 자초하였다. 기독교가 도시 가운데 교회당을 짓고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아프리카 오지에까지 선교사를 파견할 때, 불교는 산중에서 고고하게 가부좌를 틀거나 염불만 하였다.
신부와 목사들이 열심히 현대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공부할 때, 스님들은 좌복에 집착하거나 한문 공부에만 시간을 허비하였다. 기독교가 대통령, 장차관, 판검사, 언론사 국장 등 최상층 엘리트들을 독점하며 권력을 이용해 기독교 국가로 매진할 때, 불교는 절집 안의 권력다툼에만 연연하였다. 한국불교의 중세성에서 빚어지는 모순은 기복 불교, 봉건적 위계질서, 가부장주의 및 가부장적 제도, 중세적 교리 및 가치의 답습 등이며 이 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것이 기복 불교다.
한국 불교는 무속, 풍류도, 산신신앙 등 전통의 사상과 문화, 의례와 습합하는 양상을 띤다. 21세기 오늘에도 대웅전 옆에 산신각이 자리하고, 관음청과 함께 산신청을 올린다. 그러기에 역사와 전통으로서 기복불교를 부정하는 것은 자칫 나의 정체성, 한국문화와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에 문화유전자(meme)처럼 존재하는 기복성의 성향을 없앤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 불교는 이제 기복성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기복적인 불교 의례와 행위는 불교가 중세의 낡은 껍질에서 벗어나 현대화하는 것을 막는 가장 큰 장애이자 불교 교리를 부정하는 반불교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본의를 상실한 기복적인 불교 의례와 행위는 연기와 업을 부정한다.
모든 것은 연기와 행위에 의한 업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지 기도가 그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중아함 권17의 『가미니경(伽彌尼經)』을 보면, 살인 등 악행을 행한 자가 죽은 후 주변 사람이 극락왕생을 기원한다고 해서 왕생을 할 수 없다며, 이는 큰 바위를 깊은 물에 던져 놓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바위가 떠오르도록 합장하며 주문과 기도로써 찬송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반면에 선행을 한 자는 버터나 기름이 담긴 병을 깊은 물에 던져 깨뜨렸을 때 병 조각은 가라앉고 버터와 기름은 자연히 물 위로 떠오르는데 사람들이 합장하며 주문과 기도로써 가라앉도록 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였다.
모든 것이 연기와 그 행위의 업에 의해서 이루어지니 기도와 찬양이 그를 바꿀 수 없다고 부처님은 단언하신 것이다. 그러니 왕생을 바라고 행복을 원한다면 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복을 짓는 일을 해야 한다. 부처님 말씀대로 팔정도를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복전(福田)을 짓는 일이다. 몰연기적이고 맹목적인 기복은 깨달아 부처가 되려는 불교의 본의를 부정한다.
불교의 믿음은 신을 믿고 신에게 구원을 바라는 종교가 아니다. 깨달음을 지향하는 믿음이다.
대승불교의 궁극 목표는 자각각타, 각타원만, 즉, 자타불이 이므로 나의 깨달음이 중생의 깨달음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과 발심과 행이 하나가 되어야만 불교 신앙이라 할수 있다.
그러니, 복을 바라는 발심을 하면, 선업을 짓는 일을 하여 그 과보로 현세든 내세든 즐거움을 누리면 된다. 기도를 한다면 다른 대상에게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래 지니고 있는 그 근본자리, 자성불自性佛에게 해야 한다. 내가 맑은 마음을 가지고 바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올바르게 실천행을 행하며 선업을 쌓는 즐거움을 늘 누릴 수 있도록 간절한 원력을 세워야 한다는 말이다.
기복성과 주술성 논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여성의 기복 불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어머니들이 영험하다는 곳에 새벽에 달려가서 아들의 합격발원기도를 하고 있다. 백일, 천일을 하루도 쉬지 않고 높은 산의 영험하다는 암자에 올라 기도하는 일은 과거의 전설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이다.
그 지극정성에 가슴이 저밀지언정, 그 누가 함부로 비판할 수 있겠는가. 『여시어경(如是語經), Itivuttaka』 「제4부」의 말씀대로, 어머니는 가없는 사랑을 베푸시니, 진정 최고의 존재이자 참스승이고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행하듯 기도하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할 이가 없으며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희생은 보살행의 전형이다.
그러기에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부처다. 소위 ‘치마불교’에 대한 비판이 가부장적이고 오리엔탈리즘적이란 명법스님의 비판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기복행위가 현재의 복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되갚는 회향으로 나아간다는 주장, 어머니의 책임과 희생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이타주의의 대안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요소가 있으며 이는 남성들도 지향해야 할 진정 소중한 가치라는 점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중력의 원리가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에 작용하듯, 연기와 업 또한 모든 존재와 사건과 관계에 작용한다. 나의 행복과 너의 행복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타자의 행복을 위해 원력을 세우고 행하며 그 인과작용으로 나의 복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어야지 그 반대라면 불교가 아니다. 타자를 향해 열린 책임과 희생은 부처님의 마음이자 근대성을 극복하는 탈현대적 주체성과 연결되지만, 가족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는 책임과 희생은 (중세적) 맹목이다.

2.2. 기복불교의 극복과 대안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기독교는 ‘계몽, 신식, 선진’이었고, 불교는 ‘봉건, 구식, 후진이었다. 이 때문에 계몽기의 엘리트들은 거의 교회로 달려갔다. 지금도 젊은이들은 불교를 그리 생각하고 기피한다. 우리는 불교를 공부할수록 불교야말로 과학이라고 주장하지만, 불교철학이 외려 현대과학도 채 인식하지 못한 우주의 숨은 진리를 밝히는 등불이라고 말하지만, 불교 철학의 과학적인 맛을 음미하기 전에 젊은이들은 절집을 멀리 한다.
그 정점에 합격발원기도와 같은 자기중심적인 기복신앙의 의례가 자리하고 있다. 소망의 발현을 부정하고서 종교가 성립할 수도 없다. 소망을 빌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소망을 빌지 않고 어찌 종교가 성립될 수 있으랴. 타인의 소망과 어긋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느 경전에 있는 어느 부처님이 다른 자식을 떨어뜨리고 내 자식만 합격시켜 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실까. 이것은 부처님의 뜻과 어긋난다. 합격발원기도를 부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 생각하면 무지한 것이고,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라 알면서 돈을 받는다면 삿된 것이며, 중생을 혹세무민하는 것이다.
영험이 있다는 기도처는 한 해에만 수십 억 원을 번다. 이 돈의 유혹에 취하여 기복불교에 머무는 한 한국불교의 미래는 없다. 절이 정녕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고 그 마음에 이르려 수행정진하는 도량이라면, 조계사를 비롯하여 모든 절에서 합격발원기도 현수막을 내려야 한다.
그럼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첫째, 주술의 효험을 바라지 말고 연기와 행위에 의한 업의 원리를 굳게 믿으며 기도하자.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내가 변하고, 변한 나를 보고 내 가족과 이웃, 사회가 변하고 그것이 다시 나와 내 자식, 사회를 변하게 하고, 결국 나와 내 가족의 복이 된다.
둘째, 내가 행복하기 바라거든 먼저 남을 먼저 행복하게 하자. 남을 위해 복을 지으면 내 마음이 흐뭇해지고, 그 복이 마침내 나에게로 온다.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그곳에 부처님께서 자리하신다는 생각으로 타자를 향하여 열린 마음과 베푸는 마음으로 보살행을 행하면 언제인가 그 행은 나의 복이란 과보를 낳는다.
셋째, 믿음과 발심과 행이 하나가 되는 기도를 하자. 주문과 진언을 외우며 복 짓기를 서원하는 발심을 하고 부처님의 크신 힘과 가피를 굳게 믿고 팔정도를 지키며 올바르게 자리이타의 보살행을 행하면 현세와 내세가 모두 즐겁다.
넷째, 늘 나의 깨달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빼놓지 말자. 내가 깨달으면 타인도 깨닫는다.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한다. 늘 맑은 마음을 가지고 바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올바르게 실천행을 해달라고 간절히 빌면, 내 안의 변화가 오고 부처님의 가피마저 받아 깨달음이 오고, 그리 깨달은 나는 타인을 깨닫게 하고 결국 세상도 변화시킨다.
매일 이렇게 발원해 보자.
“참된 성품 등지고서 탐진치로 지은 업장 / 이제 한마음으로 참회하옵니다. / 부처님이 이끄시고 보살님네 살피시어 / 지혜의 눈 빨리 열려 모든 진리 알아내고 / 좋은 방편 빨리 얻어 온갖 법문 다 배우며 / 모든 것이 무아이고 연기임을 깨우쳐서 / 모든 허상 깨버리고 일체 공함 깨달으며 / 모든 욕망 모든 의심, 모든 집착 버리고서 / 가는 곳곳 불법 깃발, 육바라밀 행을 닦아 / 모든 사람 모든 생명 내 몸처럼 보살피고 / 망심 닦고 무명 없애 부처님이 되었어도 / 진흙 속에 연꽃 피듯 일체 중생 구제한 뒤 / 고통바다 헤어나서 열반언덕 올라지이다 / 나무 석가모니불 / 나무 석가모니불 / 나무 석가모니불”

3.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수행과 재정의 분리

3.1.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화폐증식의 욕망
간단히 말하여, 자본주의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하여 임금을 주고 상품을 생산하여 시장에 팔아 이윤을 얻어 이를 자본으로 축적하는 체제다. 지금 우리는 모두 이 체제 속에 살고 있다.
노동자는 임금을 받고 자신의 노동을 판매하고 시장에 가서 상품을 사서 소비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실제로 생산한 것보다 임금을 덜 주고 잉여가치를 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한다.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윤추구만을 위한 자본주의 체제의 가치는 우리의 삶을 규정할 뿐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이윤추구를 위한 자유경쟁을 바탕으로 한다. 누구나 자유로이 자신의 노동력을 발휘하여 생산을 해내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 있다. 누구든 합리적으로 경영하여 기업을 운영하고 시장에 상품을 내다팔아 자본을 축적할 수 있다. 어떤 상품이든 시장에서 자유경쟁을 하여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합리적으로 가격을 형성한다. 누구든 시장에서 잘 팔릴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할 수만 있다면, 부자가 되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대중들은 일을 하여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원하는 상품을 사서 마음껏 소비하는 향락을 누리고자 기꺼이 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자신의 모든 능력과 가능성을 구현하고자 노동에 자신의 몸과 마음과 머리를 투여하였다. 이로 엄청난 생산이 이루어졌다. 수십 억 명이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사람 사이의 경쟁을 정당화하고, 계층 간의 격차와 계급갈등, 물화와 소외를 심화하고 모든 사람들이 화폐증식의 욕망에 휩싸이게 한다. 노동은 세계를 자신의 목적에 따라 구성하여 생산을 이루어내고 진정한 자기실현을 달성하는 방편이 아니라 단지 돈 버는 수단, 생계의 도구로 전락한다.
모든 것이 시장에서 상품으로 교환되면서 교환가치와 사물의 본래 가치가 전도된다. 이에 따라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 물화(物化,reification)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이들이 시장에서 상품으로 교환되는 가치를 우선시 하면서 모든 것을 물질로, 돈으로 대체하여 바라보기에 사람들의 관계가 사물의 성격을 지닌다. 물화한 개인은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물질의 눈으로, 상품관계로 바라본다.
이에 자본주의 체제에서 모든 사람들은 본질적 노동가치로부터 소외, 공동체로부터 소외, 인간존엄의 소외를 겪는다. 자본주의 체제를 수용하고 발전하면서 한국 사회 또한 급격히 변화하였다. 자본주의의 가치는 더욱 깊게 한국 사회에 스며들었다. 대의와 명분을 중시하고 정에 이끌리던 이들이 점점 물질적 가치에 매달렸다. 사람의 인격을 중시하던 이들이 돈으로 환산하여 사람을 바라보고 대하기 시작하였다. 공동체는 해체되고 이기적 욕망으로 가득한 개인들이 서로 대립하였다. 아름다운 자연과 환경은 파괴되고 개발지상주의가 만연하여 그 자리를 공장과 산업 및 위락시설이 대체하였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격차와 갈등은 점점 심화하였다. 물질적인 풍요를 이룩하였지만 모두가 소외와 불안과 고독을 겪고 있다.
야만적인 신자유주의는 이를 더욱 극대화하였다. 신자유주의란 ① 전통적인 경제영역에서 시장을 즉각적, 무조건적, 무제한적으로 확대, 강화하고 ② 비경제적인 영역까지 포함하여 인간생활 전반을 시장원리로 작동시키고자 하는 정책이념이며, 따라서 ③시장에 전인격을 포획시키고자 하는 기획이다.
이 체제는 자유로운 착취와 경쟁을 방해하는 모든 규제의 완화, 노동시장 유연화, 정부역할 및 개입의 최소화, 자유화와 개방화, 공기업과 교육 등의 민영화, 감세, 복지축소를 특징으로 한다. 이는 1%가 99%를 마음껏 착취하고 부를 독점하도록 하여 양극화를 심화하고 ‘빈곤의 세계화’를 촉진하였고, 무엇보다도 모든 대중들을 탐욕의 노예로 전락시켰다.
절집도 예외는 아니다. 자본주의적 가치와 화폐증식의 욕망은 이와 절연하고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할 절집과 수행자의 마음 깊숙이 들어와 있다. 믿음의 깊이는 교환가치, 곧 돈의 크기로 대체된다. 수행보다 불사에 더 관심을 두는 절이 점점 많아지고, 불사를 통해 재산을 증식하며 주지재임의 수단으로 활용된다. 신도들은 과연 어느 만큼의 돈으로 스님들께 고마움을 표현할 지 고민한다. 스님 또한 무소유를 외치며 돈을 멀리하고 수행에만 정진하려 하지만 돈 때문에 수행에 지장을 받는다.
아예 물신(物神)에 지배당하는 일도 벌어진다. 스님들이 돈과 이를 부릴 수 있는 자리를 놓고 다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교리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도 돈을 벌려고 행하는 행사가 허다하다. 주지나 총무원장 등의 선거 때만 되면 엄청난 액수의 돈이 뿌려진다. 돈을 더 끌어 모으기 위해 소임을 맡으려 하고, 소임을 맡기 위하여 돈을 뿌려대는 악순환이 다반사다. 심지어, 그리 축적한 돈을 도박과 성매매에 사용하거나 은처와 자식들에게 빼돌리는 스님도 적지 않다. 종단 주요사찰의 주지들 4분의 3이 은처승이라고 회자되는 풍문은 이제 승가내의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있다.

3.2.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대안
우리 모두 자본주의 체제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모든 이들이 소외를 경험하고 화폐증식의 욕망, 무한한 소비와 향락의 욕망을 추구하고 있다. 중생들이 소외의 고통과 헛된 욕망 속에서 헤매고 있는데, 이들을 구제할 의무를 가진 스님들은 수천 년 전의 교리만 답습하였다.
이제 스님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에 대해, 자본주의 체제 속의 대중의 삶에 대해 공부하고 이의 극복에 대해 적극 실천행을 모색하여야 한다.
왜 불가에서 돈과 관련된 비리와 부정이 끊이지 않는가.
이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화폐증식의 욕망, 소유와 소외로 인한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들을 구제하여야 할 스님들이 물질적 탐욕에 물들어 본분을 망각하고 물신의 노예로 전락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고도의 정신력과 도덕성을 갖추기 전에는 누구나 화폐증식의 욕망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며, 돈에 접촉하거나 그 흐름을 관장하면 화폐증식의 욕망은 증폭된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수행자부터 소외와 화폐증식의 욕망, 소비와 향락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이 화폐증식의 욕망을 불태우고 있으면서 어찌 중생들의 탐욕의 불을 꺼줄 수 있겠는가.\n불교는 욕망의 확장과 물질적 소비를 통해서는 행복해 질 수 없다고 설한다.
불교는 개인의 깨달음과 공동체적 삶을 통하여 소외를 극복하라고, 무소유의 삶을 통해 화폐증식의 욕망을 없애라고, 무한한 소비와 향락의 욕망을 절제하는 삶을 살라 가르친다.
부처님께서는 출가수행자들이 ‘삼의일발(三衣一鉢)’이나 ‘육물(六物)’만 소유하는 무소유의 삶을 살라 일렀으며, 이 계율을 어기면 모든 소유물을 4인 이상의 도반들 앞에 내놓고 참회해야 했다.
달마대사는 ‘구함이 있으면 모든 것이 고통이지만 구함이 없으면 이 자리가 곧 극락’이라고 말하며 무소구행(無所求行)의 실천을 제시했다. 나아가 육조 혜능 역시 욕망을 줄이고 소박한 삶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을 설파했다.
그렇게 하더라도 딜레마는 남는다. 홀로 암자에서 수행하는 자는 자본주의의 욕망을 지멸하면 되지만, 그 밖의 영역에서는 이는 불가능하다. 설혹 자본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운동을 하더라도 자본이 필요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앙굿따라 니까야』에 “비구들이여, 눈먼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여기에 어떤 사람은 재산을 얻거나 늘리는 눈을 갖고 있지 않다.……
비구들이여, 두 눈 가진 이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가? 그는 재산을 얻거나 늘리는 눈을 갖고 있다. 그는 또한 선한 방법과 악한 방법, 비난받고 칭찬받는 방법, 천하고 고상한 방법, 떳떳하고 어두운 방법을 잘 분별하는 눈도 갖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사람을 두 눈 가진 이라고 부른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니까야에서는 재산의 획득과 증식을 하지 못하는 이를 눈 먼 사람으로, 재산의 획득과 증식은 행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윤리적 정당성을 상실한 이를 한 눈만 있는 이로, 재산의 획득과 증식을 할 줄 알면서 이를 윤리적으로 정당하게 행하는 이를 두 눈이 있는 자로 분류하고 있다.
일정한 윤리규범에 따라 재산을 획득하고 증식하는 자야말로 세 부류의 인간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자다. 『증지부(增支部)』엔 다섯 가지로 재의 효용을 펼치고 있다. 부모, 아내, 자식, 하인, 일꾼을 즐겁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우인(友人)과 동료를 즐겁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가뭄과 홍수, 도적 등 재난에 대비하고 상속하기 위하여, 친족, 손님, 아귀, 왕, 신에 대한 다섯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인내와 겸손으로 자아를 성취한 성자들을 공양하기 위해 재화는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경전을 잘 살펴보면, 일정한 윤리규범에 부합하는 한, 재산의 획득과 증식은 정당한 것이며, 나와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성자에게 공양할 수 있는 길이다. 한 마디로 재정에 대한 부처님의 입장은 중도인 것이다.
중도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 사찰을 운영하는 길은 명확하다. 출가 수행자는 계율에 따라 수행과 중생구제에만 전념하고, 재정의 운영은 재가불자 등 전문가에게 맡기며, 재산의 획득과 증식, 재정의 지출은 불교 교리와 계율, 윤리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일에 한해서만 허용하는 것이다. 이의 구체적인 방법은 절마다 사찰운영위원회를 두고 여기에 4부대중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모든 재정관련 사항에 대한 심의만이 아니라 의결을 행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종단은 회계 관리를 할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이를 일정 규모 이상의 사찰에 파견한다. 종단에서 회계관리 운영시스템에 관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각 사찰에 보급하고 이를 통합하여 중앙에서 관리한다. 각 사찰 운영위원회는 회기별, 월별로 재정의 수입과 지출 현황을 홈페이지에 공개한다. 모든 결제는 신용카드와 온라인을 사용한다.
금번 임시 종회에서 재정과 권력을 분리하고 사찰운영위원회가 심의 및 의결기능을 갖도록 개정하고, 전문 인력을 통한 재정운영과 회계관리 시스템을 통해 운영 관리되도록 사찰예산회계법을 제정한 것은 획기적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아직 많이 남았다. 사찰운영위원회의 민주성과 지속성, 감시체계의 확립이 수반되어야 사찰운영위원회는 실질적으로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주지와 다른 운영위원, 스님과 재가불자 사이에 권력이 비대칭일 경우 사찰운영위원회는 큰스님이나 주지의 의사를 추인하는 형식 기구로 전락할 수 있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주지 내지 스님에게 권위와 권력이 집중된 지금의 사찰문화가 바뀌어 4부대중의 공의를 민주적으로 모으고 실천하는 공동체 문화가 확립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까지 사찰운영위원회의 구성을 출가자와 재가자가 1:1이 되도록 구성하고, 운영위원을 선거를 통하여 선출하되, 이 선거에 각 사찰에 소속된 모든 불자가 참여해야 한다. 주지의 일방적인 권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찰운영위원회에 주지의 추천권을 반드시 부여해야 한다. 아울러 사찰운영위원회의 회의도 월별 및 회기별로 정기적으로 행할 것을 명시해야 한다.
공정한 감시체계 또한 확립하여야 한다. 교구본사 사찰의 경우 분기별로 회계감사를 받아야 한다. 그 본사 사찰의 경우 종회에 회계를 공개하고 관련 자료를 제출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 혹은 재정에 관련된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 자동적으로 전문회계사를 통한 감사를 실시하는 것을 종법으로 규정한다.
정부에 감사원이 있고, 각 공, 사기업마다 감사실이 있는 것처럼, 감시 및 감찰기구를 종단에서 사찰에 이르기까지 독립적으로 운영하여야 한다. 아울러 절에 소속된 신도는 소속 사찰에 대해, 재정 사고 및 관련 소송 당사자는 관련 사찰에 대해 재정 관련 자료를 요구하고 회람할 수 있도록 종법을 개정한다.
스님들의 사유재산도 공공화하여야 한다. 2007년 9월, 제174회 조계종 중앙종회는 승려법 제30조 2항에 ‘사유재산의 종단귀속’을 성문화했으며, 귀속된 사유재산을 스님들의 노후복지와 교육기금으로 사용하자는 합의도 하였다. 하지만, 막대한 재산과 권력을 가진 ‘큰스님’이 실행에 옮기지 않는 바람에 유명무실한 종법이 되었다.
이 기회에 큰스님과 본사 주지, 총무원장을 비롯한 종단의 소임자, 종회 의원들은 모든 사유재산을 공개하고, 이를 종단에 헌납하여야 한다. 이렇게 해서 생긴 재산은 기금으로 조성하여 스님들의 노후복지, 승려의 교육비 및 종립대학의 장학금, 사회적 약자들의 지원 및 복지 비용만으로 사용한다.

4. 근대국가 체제에서 권력의 유착과 독립

4.1. 근대국가 체제와 불교의 유착 문제
봉건체제가 해체되고 국민이 주체가 된 근대국가가 수립되었다. 근대국가는 종교를 세속화하고 정치로부터 분리시켰다. 근대국가는 헌법을 통하여 제정의 분리와 종교적 자유를 명시하였다. 한국불교 또한 형식상으로는 정치로부터 분리되고 종교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n\n하지만, 한국불교는 일제 강점기에는 천황을 떠받드는 황도불교(皇道佛敎)를 표방하였고, 군사독재 정권기에는 ‘호국불교’를 명분으로 권력과 유착관계를 맺었으며, 이는 21세기인 오늘 형식과 내용을 달리하여 계속 지속되고 있다.
호국불교를 주장하는 이들은 원광법사, 화랑, 서산대사 등의 예를 들며 호국불교가 한국불교의 찬란한 전통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중세시대의 불교는 호국불교라기보다 왕권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고, 왕권을 수호하는 진정한 이유 또한 왕권을 이용하여 불법을 수호하자는 데 있었다.\n\n호국삼부경(護國三部經)인 『금광명경』, 『인왕경』, 『법화경』 또한 마찬가지다. 산스크리트어 원문과 한역된 불경을 대조할 때, 원전에서 국토와 인민의 수호에 역점을 주던 내용이 한역 불경에서는 국왕의 수호로 바뀌고 있다. 이는 중국의 왕권계층이 중세 전제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사상체계로 불교를 택하였을 뿐만 아니라 승려계층과 더불어 불교 교리를 전제왕권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조작하는 작업에도 매진하였음을 뜻한다.
신라 왕권층이 호국삼부경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당시에 불교를 전제왕권 강화의 이데올로기로 삼는 데 주력하였던 양(梁)나라로부터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용한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또, 왕의 입장에서는 왕권 강화 이데올로기로 불교를 수용하였지만, 승려들은 왕권의 외호를 받아 불교를 널리 펼치려는 데 더 궁극적인 목적을 두었다.
하지만, 근대국가 수립 이후 호국불교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와 궤를 달리 한다. 그들은 국가를 정권으로 대체하고 동일화하였다. 호국불교가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하던 때는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과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때다. 정권은 표와 지지만이 아니라 국민을 동원하기 위하여 불교를 이용하였고, 그때마다 권승들은 불교계 안에서 권력을 갖고 이해관계를 관철하고자 정권을 지지하고 충성을 바쳤으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행사에 스님과 불자를 동원하였다. 이의 대표적인 예가 1975년에 창설한 ‘호국승군단’이다. 그러니, 호국불교는 정권에 아부 내지 충성하여 그 대가로 불교계 내에서 권력을 보장받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하여 진실을 은폐하고 자신의 이런 행위를 정당화한 허위의식의 관념체계이다.
문제는 호국불교를 표방하는 정권과 종단 및 스님들의 유착관계가 군사독재 정권으로 그치지 않고 지금도 계속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목사에게 무릎을 꿇은 정권은 출범 당시부터 지금까지 갖은 훼불행위를 노골적으로 행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종단의 상층부의 결단과 불자들의 지지를 받고서 출발한 산문폐쇄조차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삼일천하에 그치고 말았다.
이는 한국불교와 종단이 호국불교 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못한 점, 정권과 유착관계가 멀리로는 일제 강점기, 가까이로는 군사독재 정권기부터 관례적 문화와 제도로 정착된 점, 몇몇 권승들의 유착 카르텔이 공고한 점, 상당수 소임 승려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점, 불자들의 감시체계와 견제가 미약한 점, 정부 및 지자체의 지원으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한 종단 및 사찰의 재정 문제, 불자들의 사찰 및 첩보활동을 통하여 몇몇 스님들의 범계행위 정보를 갖고 있는 권력층이 이들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다루는 방편으로 활용하고 있는 점 등의 요인 때문이다.

4.2. 정권으로부터 독립과 대안
근대국가가 헌법으로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명시하고 있지만, 이는 불법과도 일치한다.
『증일아함경』 제42권 「결금품」에서는 국왕을 가까이 하는 출가자는 열 가지 비법(非法)이 생긴다고 가르친다. 『장아함경』에 의하면, 공공의 질서를 유지하고 도둑을 방지하며, 공정한 재판을 진행시켜줄 적임자를 선발하고, 선발된 적임자는 농업이나 다른 생계수단에 전념할 수 없었으므로 그의 봉사에 보답하기 위하여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생산물의 6분의 1을 주기로 합의하였다.
불교도들이 국왕을 넓은 의미의 고용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의 원형은 고대 바라문교도에 의해서도 보존되고 있었다. 《보다야나(baudhayana)》란 책에 의하면 국왕은 개인 수확물의 6분의 1의 세금과 벌금 등으로 백성에게 고용되어 있다고 말하며, 따라서 백성 중에 누군가가 도둑을 맞았는데 그 도둑을 잡지 못하면 국왕이 자신의 소유물로 변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불교가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아직 한국 불교가 근대성을 획득하지 못한 대표적 징표이자 초기경전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아니더라도, 소임자들은 권력층에 충성할수록 불교와 종단의 권력이 약해지는 역설을 직시해야 한다.
권력층의 입장에서는 종교집단이 가장 무서운 상대인데 스스로 투항해오니 그리 고마울 데가 없는 형국이다. 국가 체제 안에서 권력과 종교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건강한 긴장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서로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 중국선종은 권력과 유착하면서 몰락하였고, 반면에 일본불교는 메이지 유신 이후 권력의 탄압을 받자 인재양성, 사회사업, 문화사업 등에 힘써 세계불교를 주도하고 있다. 이런 권력의 공학적인 관계를 모르고 권력과 야합하였다면 무지한 것이고, 그를 알면서도 행하였다면 사악한 것이다. 권승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거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 큰 권력을 끌어들여 훼불행위를 한 것이다.
앞으로 종단 차원에서 군사독재 정권에 충성하여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을 공식적으로 사과함은 물론, 호국불교 논리가 권승과 정권이 합작하여 만든 허위의식의 관념체계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범계행위를 한 자와 권승으로 확인된 자들의 죄질에 따라, 영원히, 혹은 일정 기간 동안 더 이상 소임을 맡지 못하도록 종법으로 규정하여야 한다.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금은 종교에 대한 지원금이 아니라 한국 전통문화와 문화유물에 대한 지원임을 명확히 하여 끊임없이 벌어지는 기독교계의 시비를 차단하고, 이것이 권력층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국회 차원의 운동을 통하여 관련법을 개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종교의 순수성과 탈정치를 주장할 필요는 없다. 4대강 사업 반대집회 때마다 연단에 올라온 스님이나 성직자의 일성은 정치성을 배제하고 각 종교가 가지고 있는 생명관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총칼과 정보력이 없는 시민계층이 자본 및 국가에 맞서서 싸울 수 있는 무기는 도덕적 헤게모니와 정의와 평화를 향한 열정이다. 간디의 사례처럼, 도덕성과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근본으로 해야 싸움도 정당성을 갖고 끝없이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새만금도, 4대강도, 지리산 댐도 모두 정치적 관점과 장기집권의 야욕에서 시작되었다.
생명을 죽이고 갈등과 전쟁을 통해 이득을 얻으려는 세력이 정치적인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는 현장에서, 정치적 관점을 포기하는 그 순간 싸움은 이미 패배를 상정한 것이다. 더구나 이는 자신들만의 고귀한 싸움, 혹은 자기만족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모든 정책에 정치성이 스며들고 권력의 이해관계가 얽힌 현대 사회에서 정치성을 배제하는 그 자체가 정치적이다. \n정치경제적 관점과 저항을 수반하지 않는 운동은 ‘운동의 (종교적, 혹은 사상적) 순수성’이라는 이름 아래 다른 모든 저항을 무력화 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기 십상이다.
한국 불교는 이제 충분히 정치적이어야 한다. 총선과 대선, 지자체 선거 때마다, 몇몇 큰스님이나 주지, 소임자의 지지 성명에 따라 기울어질 것이 아니라, 야단법석처럼 4부대중이 모두 참석하는 각 후보자에 대한 토론회를 공개적으로 열고 이를 관례화하고 여기서 누가 가장 불법에 합치하는가 공의를 모아야 한다. 그래야 불자들은 정치적 각성을 할 수 있고, 정권은 야합할 수 없게 되며, 권승들을 중심으로 한 야합과 이해관계의 카르텔도 무너지며, 결국 불자들의 뜻과 의지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다.
불자들에게 가장 관심이 많은 환경 및 생명운동으로 예를 들면, 정치적 전략으로서 단기적으로는 환경과 생명을 보호하는 정책을 내놓는 이들을 지방의회 의원 및 군수, 국회의원으로 선출하는 운동을 하고, 장기적으로 모든 정책과 개발이 사찰을 포함한 지역주민의 협치(協治)에 의해서만 가능하도록 거버넌스 시스템(governance system)을 구축해야 한다.
경제적 전략으로서 개발이익에 현혹되어 이를 지지하는 주민들을 깨어있는 주체로 의식화 하고, 토건카르텔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운동을 전개해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생태적 순환이 가능한 도농공동체(都農共同體)를 곳곳에 세워야 한다.
사회문화적 전략으로 과도한 욕망이 외려 불행을 야기하고 나누고 배려하고 섬기는 소욕지족의 삶이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의식의 전환을 유도하고, 모든 생활의 장에서 생태론적이고 생명론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5. 승단의 문화와 계율 사이의 괴리와 범계행위에 대한 진상규명

5.1. 승단의 문화와 계율 사이의 괴리 문제
홍주종의 흥선유관(興善惟寬)의 말처럼, 무상보리란 것은 몸에 걸치면 계율이요, 입으로 말하면 법이요, 마음으로 행하면 선이 된다. 즉 계율이 바로 법이요, 법은 선정을 떠나지 않으니 계, 정, 혜를 따로 분리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계율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점이다.
윤리는 교리와 달리 보편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맥락 위에서 형성된다. 윤리는 사회문화적 맥락이 변하면 같이 변해야 한다. 변하지 못하면 윤리를 통한 자유는 사라지고 속박이 된다. 그러기에 윤리와 계율을 논하려면 먼저 사회문화적 맥락을 살펴야 한다.
필자는 문화를 연기론적으로 정의한다. E.B. Tylor에서 C. Geertz에 이르기까지 서구 학자들의 문화 정의는 실체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동쪽이 있어 서쪽이 있고, 나무가 풀과 관계 속에서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란 의미를 갖듯, 문화 또한 타자를 자연이나 야만으로 설정하고 이것과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에서 빚어지고 해석되는 상대적 개념이다.
이에 “문화란 자연이나 야만과 구분되는 세계에서 구성원들이 세계를 나름의 체계와 코드로 해석하고 대응하면서 세계관과 상징을 형성하고 그 세계관-주동적, 잔존적, 부상적 세계관-의 구조와 상징체계 속에서 자신과 자연과 세계와 타인, 사회에 대해 이해하고 설명하고 해석하고 소통하며 끊임없이 의미의 상호작용을 하고 이 의미의 망 안에서 서로가 자신과 집단의 삶의 지향성에 부합하는 의미를 중심으로 실천하고 기억하고 전승하면서 생성하는 역동적인 총체”로 정의한다.
이 정의처럼, 문화는 상대적이자 연기적이다. 승단의 문화는 비승가문화를 전제로 하며, 이것은 상호 조건의 관계에 놓인다. 디지털 사회로 이행하면서 승단과 비승단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예를 들어, 출가라 함은 세간을 떠난 것을 이르는 것인데, 상당수의 스님들이 오프라인상으로는 출가하였으나 온라인상으로는 세간에 머물고 있다. 핸드폰이나 스마트폰, 인터넷을 통해 속인들과 수시로 소통하면서 세간사를 접하며, 그 중 일부는 야동을 내려받거나 세간에서도 금지한 범계행위를 행하기도 한다. 도박사태의 근본 원인 또한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문화와 계율 사이의 괴리에서 빚어진 것이다.
특정 집단에서 어떤 것이 문화로 자리를 잡으면, 규범은 그 문화를 규제하는 장애로 인식되며, 결국 문화에 맞추어 규범이 변할 때까지 문화와 규범 사이에 괴리가 생긴다.

5.2. 계율의 개정과 진상조사위원회
아무도 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어부가 기준치 이하의 생선을 놓아주면서 주체의 자유로움에서 오는 황홀감에 취하듯, 수행을 통하여 자유로운 주체는 계율을 지키는 행위를 통하여 환희심에 젖는다. 하지만, 그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한 수행자들은 자아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자성불의 목소리, 감시의 시선과 범계에 따른 벌이 두려워서 계율을 지키게 된다. 가장 아래 단계의 수행자들은 벌 때문에 계율을 지키려 하는데, 그 벌이 공정하고 엄정하게 집행되지 않으면 두려움을 상실하고 범계행위를 하게 된다.
그동안 호법부는 공정하지도 엄정하지도 않았다. 권력을 가진 이, 문중의 도반처럼 인적인 관계에 있는 자들에게 너그럽기는 사회와 마찬가지였다. 호법부를 별도의 독립기관으로 정하고, 양형기준을 적시하여 사적인 감정이 자리할 여지를 없애야 한다. 대다수의 수행자에게 벌보다도 계율을 지키도록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자성불의 목소리와 감시의 시선이다.
하지만, 계율에서 어긋난 것이 문화가 될 때 부처님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감시의 시선은 전도된다. 예를 들어, 거마비가 이미 승가의 문화로 관례화한 곳에서 이를 받지 않으려 하는 자가 외려 그 집단의 눈총을 받고 왕따를 당한다. 문화와 관례에 의하여 감시의 시선이 전도되면, 그를 어기는 자 사이에 ‘공범의 연대’가 성립하여 죄책감을 갖지 않게 되고 지키는 자를 타자로 설정하여 그를 감시하고 배제하면서 연대를 강화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이 경우 그 시선에 맞서서 계율을 지키는 것에 용기가 필요하며, 때로는 그 집단으로부터 추방도 각오해야 한다. 종단은 차제에 승단의 문화와 계율 및 청규, 사회법 사이에 괴리를 빚고 있는 것에 대해 면밀히 조사하고 이 괴리를 메워야 한다.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경우에는 문화를 계율에 맞추어 바꾸어야 할 것이고, 다른 경우에는 계율을 바꾸는 경우도 있어야 할 것이며, 양자 모두 조정해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여 다소 수정해야 할 계율도 있다. 현재 문화와 계율 사이의 괴리가 가장 큰 것이 음주문제일 것이다.
필자를 포함하여 재가불자들 가운데 대다수가 이를 지키지 않고 있으며 출가자 또한 상당수가 음주를 한다. 불교에서 음주를 경계하는 것은 그 인연담에서도 이야기되듯이, 음주를 함으로써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사람들의 조소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불음주의 계율은 제 정신줄을 놓아 버리지 말라는 경계다. 또 당시 사회에서 술은 카니발에서 인간을 엑스타시에 이르게 하는 매체로 활용되었기에 지금의 마약과 유사한 기능을 하였다.
인간 사이의 정을 중시하고 술을 매개로 한 소통이 활발한 한국 사회에서 술 없이 사람과 관계를 돈독히 하고 포교를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런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여 무조건 음주를 금지한다기 보다 술을 먹되 상대방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정신을 잃지 않는 선에서 절제하라는 것으로 개정할 수 있다.
아울러 인터넷을 홀로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든지, 디지털 문화에 맞는 새로운 청규도 필요할 것이다. 스님들이 계율을 지키고 수행과 포교에만 전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스님들도 재미있게 생활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계율과 청규를 현대화하여 지키지 못할 계율과 청규는 개정하는 한편, 스님들도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문화 창조 운동을 전개하여야 한다.
도박이나 음주를 대체할 스님들의 놀이문화 개발, 족구, 축구 등 스님들의 체육활동을 보장하고, 신도나 마을주민과 함께 하는 체육, 문화 활동도 필요하다. 스님들의 취향과 능력에 따라 시, 노래, 악기 연주, 그림, 등산 등의 취미활동도 보장하고,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사찰이나 교구 안에 동아리를 만들고 지원하는 것도 고려해 볼 사안이다.
아울러, 스님들도 이원화하여, 이판승의 경우 더욱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수행 비구승 -사자상승- 지원체제를 확립하고 사판승의 경우 교화승(포교승)으로 구분하여 결혼과 공인된 재산의 사유를 인정하되 상좌를 두지 않고 일정 정도 이하의 소임만 갖도록 제한하는 것도 이 시대에 필요한 연구 과제다.
이처럼 문화와 계율 사이의 괴리를 메우는 작업을 해야 하지만, 이런 사유로 지금까지 저지른 범계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스님들의 범계 행위가 불교를 쇠망하게 할 만큼 극단의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종단도 이를 의식하여 성찰과 쇄신을 하겠다고 나섰는데, 진실 없는 참회와 성찰은 쇼에 지나지 않으며, 외려 쇄신의 장애다. 모든 성찰과 쇄신은 진실의 조사와 공표로부터 시작한다.\n\n신뢰받는 출가자와 재가자 공동으로 “청정승가정립을 위한 범계행위 진상조사위원회(가칭)”를 구성하여 빠른 시일 내에 모든 진실을 조사하여 보고서 형식으로 발표하여야 한다. 조사한 후 드러난 허물이 개인적인 것은 참회하고, 드러난 문제가 구조적, 제도적인 것은 제도를 개혁하여야 한다.
일부 불자들은 진상이 드러날 경우 종단의 혼란과 불교의 위상 전락을 우려한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범계 행위는 계속될 것이며 결국 불교는 대중의 지지를 상실하여 사라질 것이다. 약간의 혼란과 대중의 충격, 위상 전락이 따르겠지만 재빨리 성찰하고 제도개혁을 해나간다면 그를 중심으로 불자들이 하나가 되고, 잃었던 신뢰와 지지를 되찾을 것이며, 위상도 다시 회복될 것이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진실을 낱낱이 조사하고, 공표하고 함께 성찰하고 모든 삿된 것을 몰아낼 수 있는 제도 개혁을 단행해야 할 것이다.

6. 남은, 중요한 개혁안

위에서 논한 것 말고도 더 중요한 개혁안이 많다.
다만, 네 가지 범주; 1.중세성 및 기복불교의 문제점과 대안 2.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수행과 재정의 분리 3.근대국가 체제에서 권력의 유착과 독립 4.승단의 문화와 계율 사이의 괴리와 범계행위에 대한 진상규명으로 묶다 보니 빠졌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일과 행사에 4부대중이 함께 하는 평등하게 참여하는 공의제를 이번 기회를 통하여 정착시키고 구체화, 활성화하여야 한다.
종회 또한 양원제로 나누어, 상원은 계율대로 대덕이상의 출가자만으로 구성하고, 하원은 출가자와 재가자들을 함께 구성하여 상호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출가자들도 특정 문중이 특정 사찰을 점유하는 문중중심의 가부장주의를 해체하고 비구와 비구니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
스님과 재가자의 수직적이고 종속적인 관계도 청산되어야 한다. 평등성이 전제되지 않는 인간관계는 반불교적이기 때문이다. 스님들의 교육도 혁신하여 스님들의 무상교육을 실시할 재원을 마련하고, 교과과정에 현대사회와 인간을 이해할 수 있도록,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을 추가하여야 한다.
통합선거법 제정을 통해 공정한 선거관리 장치를 마련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각종 범계행위자에 대하여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제한하는 규정도 필요하다. 사회담론을 생산할 씽크탱크(think tank)를 만들고 그럴 만한 능력을 가진 자들을 네트워킹하여 이슈가 있을 때마다 이에 대한 심층분석과 토론 및 이론화 과정을 거쳐 불교적 대안을 제시하고 담론을 주도해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회적 실천을 적극적으로 활성화하는 것이다. 사회적 실천을 할 재정을 확립하고 이를 제도화하고 활성화하여야 한다.
유마경의 말씀대로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아프다. 중생의 고통에 진정으로 공감하며 이를 치유하는 실천을 행할 때, 대중들은 마음 저 깊은 곳으로부터 부처님을 받아들인다.
이제 종단을 중심으로 빈민,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 등 소외계층과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과 대다수의 국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구제책을 개발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영역을 전 지구촌에 확대해야 한다.
단순히 구제책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빈민,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 등 소외계층을 포용하는 불교공동체, 자본주의와 산업사회의 역기능과 모순을 극복한 대안의 불교공동체 모델을 개발하고 이를 여러 곳에 만들어 현대사회와 지구촌의 대안이 불교에 있음을 대중들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7. 맺음말

흔히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고 한다. 개혁은 사람과 의식, 제도, 문화의 개혁이 함께 이루어져야 현실이 되며, 개혁을 추진할 기구와 운동단체, 동력 또한 필요하다. 개혁추진기구를 중심으로 범 출재가자가 참여하는 결사, 법회, 솔선수범, 승풍 진작의 문화운동도 전개할 필요가 있다.
개혁은 단계적으로 모두가 함께 지혜와 힘을 모아야 당위와 선언에서 벗어나 현실이 된다. 종단은 혁신적인 개혁을 하되, 개혁의 로드맵을 제시하고 4부대중은 이를 실행해야 한다. 아울러, 어떤 좋은 개혁안도 역기능이 있으므로 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쇄신안에 대해서는 여론조사와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모든 국민에게 문호를 개방한다.
94년 개혁의 공과 한계를 성찰하여 문제점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2012개혁에 반영한다.
개혁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종헌과 종법을 개정하는 한편, 내규와 시행령을 만들어 곧 바로 실행에 들어간다.
반토막이 난 우리와 달리 서양에선 왜 불교도가 늘고 있고 상당수 석학들이 다투어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고 있는가. 그들은 현대사회의 위기, 곧 이성의 도구화, 소외와 불안, 공동체의 해체, 환경위기 등의 대안으로 불교를 선택하고 있다.
이에 서양 불교는 마음공부에 충실하고 대안의 성격이 강하다.
다행히 불교는 탈현대의 모색과 통하는 점이 많다. 20세기 한국 사회의 과제는 근대화와 산업화, 민주화, 인권, 통일이었다. 이는 우리가 아직도 달성해야 할 과제이지만, 21세기에는 환경과 생명, 남북의 통일을 포함한 평화, 복지와 상생이 새로운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20세기의 과제는 기독교가 주도하였지만, 21세기의 과제는 불교가 주도할 수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자.
이제 종단의 권력층은 개혁을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남김이 없이 개혁하여 한국 불교도 살리고 그들도 21세기의 글로벌 리더로 부상하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중생의 고통을 외면한 채 욕망 속에 물신과 권력의 노예로 전락한 것을 참회하면서, 이번 사건을 계기로 부처님 당시부터 이어져 온 ‘불교공동체’의 조직운영 원리를 21세기 사회에 맞게 창조적으로 해석하고 실천하여 진정으로 청정한 승가공동체를 세우는 새로운 지평을 열기를 간곡히 발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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