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계종 분규사 개관(1950년대~1980년대) -

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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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종 분규사 개관(1950년대~1980년대) -

전체글글쓴이: lomerica » (화) 02 07, 2017 8:26 am

청산해야 할 분규의 역사 - 조계종 분규사 개관(1950년대~1980년대) -
1998년 12월 11일 '불교 바로세우기 범불교재가연대' 주최로 진행된 '98 조계종 사태의 본질과 그 해결방안' 토론회 기조발제문입니다.
제 1 발제문 / 청산해야 할 분규의 역사 - 조계종 분규사 개관(1950년대~1980년대) -
이경순(한국불교근현대사연구모임)

1. 글을 시작하며
1998년 겨울. 한국불교의 최대종단 조계종은 분규의 소용돌이에 휩쓸려있다. 이번 분규의 발생과 진행과정을 지켜보는 대중의 반응은 '아직도 저러한 일이, 21세기를 눈앞에 둔 이 시점에 일어나야만 하는가'이다. 더욱이 94년 종단개혁을 통해 민주적이며 합리적 종단운영의 원칙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분규가 발생하였다는 것은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번 분규의 내용과 성격, 그 분쟁방법은 시대착오적이다. 시대착오적이라 함은 분규의 당사자들의 행보가 과거 조계종단을 풍미하던 분쟁의 악습을 계승하여 현 시점에 그대로 적용시키려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종단의 발전, 진보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퇴행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후부터 현재까지의 한국불교 현대사는 한마디로 '분규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중 후대에 까지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불교정화(비구 대처 분규)였다. 불교정화는 이후 조계종 분규의 근인(近因) 또는 원인(遠因)으로 이를 수 있으며 이 불교정화과정에서 벌어진 분규의 절차, 방법, 진행과정 등은 거의 모든 분규에서 원용되었다. 현재 종단의 원로들은 물론 이번 사태의 당사자들은 바로 불교정화과정을 통해 중앙종단에서 성장한 인물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조계종단이 걸어온 분쟁의 역사를 되짚어 보려고 한다. 역사적 맥락에서 이번 사태를 해석하고, 그 속에서 지금의 분쟁 당사자들이 어떤 행보를 하였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역사속에서 현재 우리가 걸어야 할, 혹은 걷지 말아야 할 길들은 무엇인가 하는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2. 불교정화(1954~1962) - 비구 대처 분규
해방이후 불교계는 일제식민지시대의 산물인 대처승의 처리를 두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해방공간의 이념투쟁과 6.25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불교계 역시 당면한 시대적 과제를 해결치 못하고 분단을 맞았다. 그후 비구승측에서는 비구승의 권한에 대한 주장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1952년 송만암스님은 통도사회의에서 이판승과 사판승의 구별원칙을 천명하였고, 선학원에 모인 비구승들은 수좌대회를 통해 비구승의 수행을 위한 사찰배분 요구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불교계를 장악하고 있었던 대처측은 기득권을 포기하려 하지않고 비구측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4년 5월 이승만대통령이 '대처승은 절에서 물러가라'라는 유시를 내렸다. 유시의 배경에 대한 해석으로는 이승만대통령의 장기집권음모 관철과 불교내분조장을 통한 불교의 약화 책동이었다는 설이 현재까지 불교계에 많이 퍼져 있다. 이러한 대통령의 유시는 그 유시로서 비구승은 대처승과의 투쟁을 본격화할 수 있었지만 불교계의 문제에 국가권력이 적극 개입함으로서 불교의 자주성과 자정력을 훼손시켰으며 불교내에 권력지향적 성향을 뿌리내리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후 비구측은 54년 8,9월 비구승대회를 개최를 시작으로 태고사를 접수하는 등 실력행사에 나서게 되었다. 이에 대처측 역시 폭력과 법적 소송을 통해 맞섰고 각 지방 사찰에까지 절뺏기 싸움이 불붙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양측의 분쟁을 조정한다는 명목으로 문교부가 직접 뛰어들어 중재역할을 하게 되었다. 5?16군사쿠테타 이후 국가권력은 이제는 분규를 종식하라는 지시를 불교계에 내리고 1961년 불교재건위원회를 설치케 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1년뒤인 1962년 비구와 대처의 통합종단이 출범함으로서 불교계 분쟁이 형식상으로는 끝을 맺게 되었다.

이승만대통령의 유시가 기폭제가 된 불교정화는 왜색불교의 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명분으로 진행되었다. 그러한 분쟁의 결과로서 비구승단을 존립시키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통합종단이 출범한 1962년에 이르기까지 비구 대처 양측은 강경론자들이 양측의 주도권을 쥐면서 타협을 이루지 못하고 법정소송과 물리적 폭력을 동원한 기나긴 투쟁을 겪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수많은 삼보정재가 탕진되었으며 조계종단내에는 무자격 승려가 양산되었다. 또한 최대민족 종교인 불교가 국가권력에 예속되었으며 사법부의 심판대상으로 전락되는 결과를 빚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결과들이 이후 종단분규의 전례로서 체질화 되어 분규때마다 폭력에 의한 총무원 점거, 사찰점거가 일반화되고 국가권력에의 의존이 상존하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정화과정 속에 현재 조계종단을 장악하고 있는 원로들과 중진스님들이 중앙종단에서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월하스님과 월탄스님도 그 중의 일부였다. 월하스님은 1954년 정화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면서부터 비구승측의 대표적 인물로 부상하였다. 월하스님은 40대초에 불과했던 1955년 당시 불교정화수습대책위원회에 비구측의 대표로서 효봉, 금오, 청담, 경산스님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을 비롯하여 1962년 통합종단의 총무부장으로서 임명되기까지 정화기간 내내 비구측의 핵심인물로서 적극 활약하였다. 그는 대처승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주장하고 통합종단내에서 비타협적 노선을 견지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월탄스님은 25세였던 1960년 당시 비구승 대법원 난입사건 와중에서 할복을 한 6비구중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할복한 6비구는 당시 정화의 완수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결연한 의거로서 비구승측의 추앙을 받았다. 지금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이 사건은 대법원의 판결을 비구측에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시위의 성격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 비구승측의 내분(1962~1970) - 통합종단에서의 청담스님과 경산스님의 갈등
통합종단은 출범당시부터 비구승측의 주도성격이 분명하였음으로 대처승측의 반발은 예상되었던 것이었다. 대처승측은 1963년 통합종단을 이탈하여 또 다시 비구측을 상대로 한 법정소송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대처승측의 일부는 '불교화동근대화추진위'(1966)의 결의에 따라 대처승에게도 승려의 자격을 부여한 비구측 조계종단에 잔류하게 되었다.

비구측 조계종단내의 분규는 바로 이 이른바 '화동파'에 대한 처리를 둘러싼 종정 청담스님(1966년 제2대 종정취임)과 총무원장 경산스님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화동파에 대해 청담스님은 곪은 손가락은 절단해 버려야한다는 강경론인데 반해 경산스님은 치료를 해야한다는 온건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러한 대립은 선학원을 중심으로 한 수덕사파와 총무원을 장악한 통도사파간의 갈등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갈등이 표면화된 것은, 1967년 동국대 재단운영문제에서 종단이 4천여만원의 빚을 지게 한 것과 관련해 종회의원들이 경산스님을 규탄하는 한편 청담스님도 경산스님의 사퇴만이 해결책이라고 강조했지만 경산스님이 불응하자 청담스님이 사퇴를 하고 곧 이어 경산스님도 사표를 제출한 사건에서부터였다.

이후 1969년 8월 청담스님이 돌연 '현 대한불교 조계종단은 무기력하고 무능하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조계종을 탈퇴한다고 선언하여 세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청담스님은 이에 앞서 "도제교육의 현대화, 역경사업의 현대화, 포교사업의 현대화"라는 내용의 '불교유신재건안'을 제안했으나 총무원측에 의해 거부당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청담스님의 행보는 정화의 주체자로서의 고뇌로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종권에서 멀어지자 불만을 터뜨리고 종권 재장악을 획책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이는 청담스님을 지지하던 선학원파에서 전국비구승대회의 개최를 통해 종단의 실권을 잡고 종단 비구파(통도사파)와의 타협을 한 후 종단을 선학원측이 주장하는 방향으로 개편하게 된 사실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결국 청담스님은 탈종 소동이후 종단내의 권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4. 종정권한확대의 시도와 대응 (1973~1980) - 조계사와 개운사의 대치
종정과 총무원장 그리고 종회의 권한에 대한 갈등은 현재까지 조계종 분규의 주요 성격이 되어왔다. 조계종단사에서 종정의 권한에 대한 논란이 분규로까지 연결된 것은 제4대 종정 고암스님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시초는 1973년 5월 총무원장 경산스님이 제출한 총무원 사회국장 해임안을 종정 고암스님이 거부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종단의 내분사태가 악화되자 고암스님은 "종단의 불화를 막기 위해 종회의 기능을 유보한다"고 공포, 종단 내분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후 종권수호회 발족과 불국사 주지 범행스님의 총무원 제소 등 일련의 사건으로 결국 고암스님이 종정직을 사퇴하고 제5대 종정에 서옹스님이 추대되었다.

그러나 서옹스님의 종정체제 출범은 종정과 총무원의 갈등을 극대화시켜 종단이 양분되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서옹스님은 종정은 종단의 상징적 권위라는 관례를 깨고 종정이 종단실무를 관장하겠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총무원장 경산스님은 반발하여 갈등을 빚는 와중에 아차산 대성암 토지처분관계로 경산스님이 구속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서 종정의 종권확립이 확실해지고 종정중심제로의 종헌개정이 이루어지면서 종정의 친정(親政)체제가 구축되었다.

이러한 종정의 친정에 대한 반발은 재야종회위원들에게서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하여 1977년 10월 7일 해인사에서 열린 49회 임시종회에서는 '이서옹 종정 추대결의 무효선언'과 '종정 불신임'을 결의했다. 이에 서옹스님은 '불교중흥을 위한 비상 종령'을 발표하고 종회해산을 명령하는 동시에 '중흥종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재야 종회의원들은 종정과 총무원장을 법원에 '종정-집행부 직권정지'로 제소했다. 이때부터 양측의 법정소송이 연달아 이어졌고 급기야 재야측에서는 총무원장에 월하스님을 선출하고 1978년 3월 개운사에 임시 총무원 간판을 내걸었다. 이로써 조계종은 개운사 총무원과 조계사 총무원으로 양분되었으며, 이때부터 양측은 3년여 동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법정시비를 계속했다. 채벽암스님이 신병을 이유로 종정직무대행직을 사임하자 개운사측에서는 1978년 고암스님을 새로 추대하였다. 그런데 고암스님은 종정취임후 조계사측을 지지하여 종단분규는 미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러한 3년동안에 걸친 조계사측과 개운사측의 종권분규는 80년대 들어서면서 재판판결과 승단지지도가 개운사측으로 확연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개운사측을 실질적으로 이끌어온 총수는 송월주스님이었고 월탄스님 또한 개운사파의 일원이었다.

1980년 3월 양측은 극적으로 분규종식을 위한 종회의원 총선에 합의하여 4월 제6대 종회의원 선거가 치뤄졌다. 이 종회의 개원과 동시에 송월주스님이 총무원장에 선출되어 종단이 법적으로는 단일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집행부를 개운사측이 독점했다는 조계사측의 반발과 양측의 불화를 겪은 끝에 개운사측이 조계사측의 총무원을 강제로 점거하였다. 이후 월주스님은 내부적으로는 자체정화의지로서 '불교정화추진본부'를 결성하고 외부적으로는 '불교관계법 개정요구 결의대회'등을 개최 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얼마뒤인 1980년 10월 27일 불교계는 건국이래 최악의 법난을 맞았다. 10.27법난은 독재정권의 불교탄압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지만 종단의 내부모순이 극도로 악화된 당시의 상황이 권력의 개입을 자초했다는 평가도 만만치 않다.

5. 급진적 종단개혁추진과 좌절(1983~1984) - 비상종단운영회의 발족과 해체
1980년 10.27법난의 충격에서 쉽게 회복되지 못한 조계종단은 80년대 초 연이은 사찰분규를 일으켰다. 사찰분규는 총무원측에서 임명한 본사주지에 대한 본사대중의 반발이 그 원인이었다. 이는 곧 총무원과 본사간의 권한다툼, 문중간의 경쟁이 표출된 것이었다. 1981년 불국사 분규, 월정사 분규를 거쳐 1983년 신흥사 사태는 살인사건이라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 신흥사사태의 수습의 과정에서 9월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가 열렸으며 이 자리에서 불교개혁과 정법수호운동을 다짐한 후 '비상종단운영회의' 설치를 결의하였다. 비상종단운영회의에서는 획기적인 종단개혁안들을 내놓았다. 종단부패와 혼란에 책임이 있는 승려에 대해 최하 5년내지 최고 10년의 공권제한을 골자로 하는 '종단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및 사정특별위원회의 징계절차 운영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신도의 종단운영 참여를 골자로 하는 '신도법'을 제정하는 한편 교화승 제도를 신설하는 종헌을 개정하였다. 또한 1984년 7월 5일 조계종 제도개혁 위원과 실행위원은 제도개혁 방안을 발표하였다. 개혁안의 핵심은 종단 대표자를 총무원장으로 하고 종무행정제도는 총무원 중심제를 원칙으로 하되 본사제도를 살리는 각 교구종무원 지도부를 새로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종단의결기구로 하원의 종단운영회의와 상원격의 교정회의를 두어 과거 종회의 기능을 대신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상종단의 급진적인 개혁추진은 종정스님과 원로스님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결국 1984년 8월 1일 해인사에서 개최된 승려대회는 비상종단체제의 해체를 결의하고 개정종헌의 무효를 선언하는 한편 총무원장에 녹원스님을 선출하였다. 총무원청사에서 강제로 밀려난 소장파 개혁승들은 8월 9일 범어사에서 "해인사 승려대회는 합법성을 인정할 수 없으며, 현 집행부의 총무원청사 점거는 폭력에 의한 불법 강점"이라는 3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범어사 종무소에서 조계종 총무원 현판식을 가졌다. 이때 비상종단운영회의의 대표적 소장파 승려는 지형, 성문스님이었다.

이후 10월 28일에는 비상종단을 주도했던 벽파, 지형스님등 30명과 폭력배 30여명이 총무원 청사에 난입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청사를 강점한 즉시 총무원 집행부를 선출하였지만 곧이어 조계사 신도 700여명에 의해 강제로 축출당하였다. 이 종권 쿠데타 사건은 불교개혁을 단행하겠다고 나섰던 비상종단 소장승려들의 의지를 새삼 의심케 하면서 종단 개혁의 시도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6. 총무원장중심제의 강행과 반발 - 봉은사 분규
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종단내의 갈등은 총무원장과 종회의 대결로 진행되었다. 총무원장과 종회의 팽팽한 종권대결의 와중에 서의현 총무원장은 1988년 3월 종헌종법의 개정을 통해 실질적인 총무원장중심제를 강행하였다. 이때의 종헌종법에 따라 종단의 법적 행정적 대표권은 총무원장이 맡게 되었다. 따라서 주지임면권이 종정에서 총무원장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종헌종법의 개정은 의현스님의 세력기반을 견고하게 하고 장기집권에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되었다.

그런데 1988년 4월 13일 총무원장 의현스님은 정적(政敵)으로 부상하고 있던 봉은사주지 밀운스님을 해임하고 부주지 대운스님을 재산관리인으로 위촉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밀운스님이 쫓겨난 이유는 밀운스님이 전해 열렸던 종회에서 의현 총무원장의 해임결의안을 상정하고자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시작된 봉은사 사태는 법정으로 비화된 것은 물론 신도와 젊은 승려들이 분규에 적극 가담하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분규당사자들의 법정공방이 연속되고 쇠파이프와 각목이 동원된 난투극이 몇 차례 있은 후인 12월 26일 밀운스님측은 '비상종단운영위원회'를 구성, 봉은사에 새 총무원을 개원하였다. 봉은사 총무원측은 "불법적인 종단운영과 혼란을 바로잡고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 봉은사에 새 총무원을 개원했다."고 경위를 발표하였다.

이로써 조계종은 또다시 강남의 봉은사측과 강북의 조계사측 총무원으로 양분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봉은사 사태는 근본적으로는 83년 비상종단의 연속선상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급기야 1989년 2월 봉은사측 총무원은 통도사에서 전국 승려대회를 개최하고 "84년 8월 1일 열린 해인사승려대회 결의는 불법이므로 이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현 총무원과 종회는 해산되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이후 양측은 서로에 대한 폭력 테러를 일삼아 사회의 지탄과 우려의 소리가 높아갔다.

그런데 돌연 1989년 5월 4일 의현 총무원장과 밀운스님은 불교중흥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밀운스님에 대한 징계를 해제하고, 밀운스님이 의현 총무원장에 대한 신상문제 폭로에 대한 사과를 하며 밀운스님의 부채 7억원을 현 봉은사 주지가 책임지도록 한다는 합의서를 발표했다. 결국 종단내외에 큰 충격을 던져준 봉은사 사태가 책임자 처벌이나 종도와 국민에 대한 사과도 없이, 분규당사자들의 사적인 밀약에 의해 종결되고 만 것이다. 봉은사사태는 총무원장 권한 강화에 대한 부작용과 반발로써 일어난 분규이면서 그러한 갈등이 종권과 금력을 쫓는 분규의 주체들의 야합에 의해 유야무야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종단분규사의 한 예였다.

7. 글을 마치며
이와 같이 195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종단 분규사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불교정화이후의 약 30년에 걸친 종단 분규사는 한마디로 종권획득을 위한 투쟁사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각 시기마다 총무원장과 종정, 종회의 권한 분쟁이 있었고 분쟁의 와중에는 폭력과 총무원 청사, 사찰의 점거, 지리한 법정분쟁이 반드시 뒤따랐다. 또한 승려대회와 종헌종법의 개정은 종권주의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이러한 종단 분규사를 통해 종권주의자들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바로 '힘이 있는 자가 승리한다'라는 것이다. 힘의 규합을 통해 폭 력적으로 실력을 행사하고 그 힘으로 종헌종법을 개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참담한 종단 분규사의 뿌리에는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가 기폭제가 되어 시작된 불교정화의 폐해가 있었다. 대처승의 척결이라는 명분을 위해서는 폭력의 행사와 국가권력에의 예속, 합리적 절차를 뛰어넘는 불법행위도 마다하지 않았던 비구승들의 그 '결연한 의지'의 습성이 이후 종단운영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과거 종단 분규사에 비춰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월하스님의 종정중심제에 대해 언급하도록 하겠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종정중심제는 1973년에서 1980년까지 제4대 종정 고암스님과 제5대 종정 서옹스님에 걸쳐 시도된 바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사실이 증명하듯 종정 개인에 의한 종정권의 강화 또는 친정(親政)체제는 종단의 운영을 혼란시키고 갈등을 야기하여 급기야 조계사측과 개운사측으로 종단이 양분되는 사태에 이르게 하였다. 그 기간 내에 벌어진 양측의 득이 없는 충돌과 지리한 법정소송, 삼보정재의 탕진은 불교의 발전에 엄청난 해악을 미쳤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 시점에서 현행 종헌종법을 무시하고 종정중심제를 주장한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을 간과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월하스님은 당시 종정중심제에 반대하고 나선 개운사파의 총무원장이었다는 사실을 돌아본다면 현재 월하스님의 행보에 아연해 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월하스님은 종정중심제를 종단운영의 이념과 원칙으로서 채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종권장악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일이다.

1994년에 벌어진 조계종의 개혁불사는 과거 종단이 보여주었던 분규의 전통을 근본적으로 청산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4년 뒤 1998년 조계종은 과거 종권 분규의 유형과 악습에서 조금도 변화하지 않은 또 하나의 분규로 시련을 앓고 있다. 지금 우리는 4년전 개혁의 의미와 과정을 돌아보면서 진정한 역사평가와 잘못된 역사의 청산을 위해 전 종도의 힘을 결집시킬 때가 아닌가 한다.

조계종 분규사 연표(1954~1990)
1954년 5월 21일 이승만대통령의 정화유시 발표
1954년 8월 24일 9월 27일 전국 비구승대회
1954년 10월 9일 비구승측 태고사 강제접수
1955년 5월 23일 양측 불교정화대책위 승려의 자격에 대한 8대 원칙에 합의
1955년 8월 11일 비구승측 전국승려대회 개최, 독자적 집행부 구성
1955년 8월 15일 대처측 서울 민사법원에 사찰정화 대책 위원회 결의 무효소송 제기
1958-59 양측, 중앙교단을 위시하여 사찰관계의 재단과 기타 재산권 쟁탈을 위해 각종 소송 제기
1960년 11월 24일 비구승측, 대법원 난입사건. 6비구 할복
1962년 1월 18일 문교부에서 주선한 불교재건위 구성
1962년 4월 11일 비구 대처 통합종단 출범
1962년 10월 4일 대처측 비구측과 다시 투쟁선언. 조계종 종헌무효확인 및 종정추대무효확인 소송
1967년 7월 25일 이청담 종정과 손경산 총무원장 사표수리
1968년 11월 7일 불국사 주지(채벽암스님) 감금사건
1969년 8월 12일 청담스님 조계종 탈퇴선언
1970년 7~8월 봉은사 유휴지 매각진행
1971년 6월 김경우 총무부장의 관악산 염불당 매각이 도화선이 되어 총무원 간부들 종헌개정이 안되면 총사퇴키로 결의
1973년 5월 29일 종정이 사회국장 해임결의를 거부한 일이 발단이 되어 총무부장등 6명 전격 사표수리
1974년 7월 이서옹스님 종정 추대
1975년 12월 23일 김대심 일당에 의한 총무원 피습사건
1977년 8월 23일 이서옹 종정 '종헌개정추진협의회' 구성
1977년 9월 30일 총무원장 경산스님 아차산 대성암 토지처분 관계로 구속
1977년 10월 제49회 해인사 중앙종회 이서옹종정 불신임 결의
1977년 11월 11일 이서옹 종정, 중앙종회해산명령
1978년 3월 재야측, 개운사에 임시 총무원 개원, 총무원장-월하스님
1980년 4월 제6대 중앙종회에서 집행부를 개운사측이 독점한 가운데 총무원장에 월주스님을 선출
1980년 5월 13일 개운사측 조계사측 총무원 강제로 접수
1980년 10월 27일 10.27 법난
1980년 11월 5일 중앙종회, 총무원산하기구 해체되고 '정화중흥회의' 출범
1981년 7월 23일 불국사 분규
1983년 8월 6일 신흥사 살인사건
1983년 11월 7일 비상종단운영회의 발족
1984년 6월 12일 비상종단 집행부 총무원 봉은사로 이전 결정
1984년 7월 5일 조계종 제도개혁안 발표
1984년 8월 1일 해인사 승려대회에서 비상종단체제 해체 결의
1984년 8월 9일 소장파 개혁승 해인사 승려대회 불인정. 범어사 종무소에서 조계종 총무원 현판식
1984년 10월 28일 비상종단 주도인물 등이 총무원 난입점거. 조계사신도들에 의해 9시간만에 축출
1986년 9월 7일 해인사전국승려대회. 불교관계악법즉각철폐, 사찰 관광 유원지화중지, 10.27법난 해명천명
1988년 3월 28일, 29일 총무원장중심제 종헌개정 단행
1988년 4월 봉은사 사태
1988년 12월 26일 밀운스님측 '비상종단운영위원회' 구성 봉은사에 새 총무원 개원
1989년 2월 25일 봉은사측 총무원 통도사에서 전국승려대회 개최. 84년 8월 1일 해인사승려대회의 결의는 불법이라 주장
1989년 5월 4일 서의현 총무원장과 밀운스님간의 합의서 발표를 통해 봉은사 사태마감
1998년 조계종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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