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불교운동의 전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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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불교운동의 전개과정

전체글글쓴이: lomerica » (화) 02 07, 2017 7:34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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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불교운동의 전개과정
발제 : 김관태

여는 글
불교운동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불교의 전파나 포교를 일컫는가하면, 교단 운영의 개혁을 말하기도 하고, 불교의 사회참여나 사회의 변혁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운동’이라고 이름 붙이려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정한 주체를 형성하여, 지속적으로 목적 달성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여야 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런 전제에 따른다면 대승불교운동, 포교당운동, 여성불교운동, 재가불교운동, 종단개혁운동, 민중불교운동, 참여불교운동, 불교정화운동 등등 수많은 운동이 존재할 수 있고 나아가 불교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 불교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거나, 진행되고 있는 수많은 활동과 이념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그 목적과 주체, 그리고 활동이 분명히 드러나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역사적, 시대적 요구와 흐름에 부합할 때 비로소 운동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되는 것이다.
한국불교사에도 운동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수많은 활동들이 존재한다. 근현대사를 보자면 일제의 종교정책에 대항하여 진행된 임제종운동이나 선학원운동, 불교청년운동 등이 근대불교를 장식하고 있고, 해방 직후에는 불교혁신운동이 전개되는 등 불교가 내, 외적 상황과 교섭하며 끊임없는 변화와 교류를 지속하고 영향력을 주고받은 모든 것에서 불교운동을 찾을 수 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필자는 승려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된 1895년부터 해방이 되는 1945년까지를 불교근대역사로, 1945년부터 현재까지를 불교현대역사로 보고 있다. 그 한국불교현대사 50년의 기점, 한국불교 근현대사 100년의 전환점에 1994년 종단개혁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는 불교근현대사가 남긴 중요한 과제를 해결해간 시기이며,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자각을 이루어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한국불교에 주어진 과제는 일제 강점기가 남긴 식민잔재 즉, 왜색불교를 청산하는 일과 불교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이 두 가지 식민지 유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불교는 수많은 내우와 외환을 겪어야 했다.

왜색불교를 청산하기 위한 과정은 정화운동으로 표출되었지만 이 정화운동은 현대 한국불교가 안게 된 수많은 악폐의 근원이 되었다. 무자격 승려의 양산, 폭력의 용인, 예외적 방법으로 급박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의 고착화 등이 그것이다. 왜색불교의 잔재인 대처승의 추방이라는 목적을 해결하기 위해 너무도 많은 비불교적 행태들을 차용하였고, 그것은 종단 분규로 얼룩진 1970년대를 거치며 한국불교에서 좀처럼 거두어지지 않는 어둠의 장막이 되고 있다.

한편, 일제의 사찰령 반포로부터 시작된 불교의 자주성 훼손과 그 회복을 위한 운동은 해방과 정화운동 시기를 거치며 오히려 더욱 요원한 일이 되었다. 정권의 비호에 의해 성공한 정화의 결과 교단과 정권의 유착은 더욱 심화되었고 10.27법난이라는 전대미문의 치욕을 겪기 전까지는 그에 대한 각성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불교 내적인 개혁과 사회 변혁의 필요성을 일깨우기 시작한 시기가 1980년대를 전후한 시기이며 이른바 민중불교운동이 일어나는 시기이다.

1. 민중불교운동의 시작
8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80년대 후반까지의 시기는 한마디로 민중불교운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민중불교운동에 대한 정의는 아직까지도 이론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불교자주화운동의 일환으로 보는가 하면 사회 민주화운동에 대한 불교의 대응방안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적어도 민중불교운동이 한국불교가 처음으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와 기층 민중의 삶에 눈을 뜨고 그와 같은 문제의 해결에 헌신한 첫 사례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민중불교의 목적은 세간(사회)의 정토화이며 그를 위해 민주화, 노동, 인권, 통일, 환경 등 사회적 의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점이 그간 불교계에서 진행되었던 여러 운동과 그 궤를 달리하는 점이다. 오늘 이 자리는 민중불교에 대한 정의나 평가를 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가 아니기 때문에 민중불교의 성격이나 이념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고 지난 30여 년 동안 전개된 양상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민중불교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76년 여름 전주 송광사에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약칭 대불련)가 연례행사로 개최해오던 화랑대회에서였다. 당시 대회는 ‘민중불교 실천을 위한 전진대회’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는데 대회 명칭에서 이미 민중불교라는 말이 76년 여름 이전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75년 고은, 여익구, 고준환, 황석영, 전재성 등이 ‘민중불교회’를 결성하였다는 기록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즉, 76년 여름에 이루어진 대불련의 이 전진대회는 그동안 제기되어 온 민중불교관계 논의를 공식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대회에서 원론, 이론, 한국사회에서의 적용 등 세 분야로 나누어져 7개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때 원론적으로 발표된 논문이 바로 전재성의 ‘민중불교운동론’이고 이 글이 후에 수정, 가필되어 1977년 월간 대화 폐간호에 ‘민중불교론’이라는 이름으로 게재됨으로써 사회적으로 민중불교라는 말을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전서암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이 글에서 전재성은 ‘민중불교’란 용어를 ‘불교의 민중화’를 주장했던 만해 한용운의 표현에서 차용했다고 전하고 있다. 물론 이 민중불교론에서 언급된 민중은 계급적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었다. 전재성은 민중불교론에서 ‘민중이란 개념은 어느 특정한 계급만을 지칭하지 않는데서 모호한 개념일 수도 있다. 아니 차라리 생동해서 움직이는 개념이기 때문에 포착하기 힘들다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중생이라는 불교의 보편적 개념에 비하면 구체적이고 시대적인 개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처음 민중불교를 말할 때 민중은 계급적 성격보다는 단순히 피지배자를 의미하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정의는 80년대를 통과하며 보다 구체적이고 계급적 성격을 갖게 되지만 당시 이 대회가 불교계 내에서 민중불교를 공식명칭으로 사용하게 된 최초의 계기로서 민중불교의 시원(始原)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대회에는 각 대학의 불교학생회 지도교수들도 참석하여 보살정신의 사회적 실천 방안의 모색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후 민중불교 이념에 입각한 특별한 활동이나 진전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불교활동의 근거지가 기존의 사찰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제약요건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원화(寺院化)운동이 탄생한다.

2. 사원화운동의 전개
사원화운동은 초기 민중불교운동의 구체적 실천 사례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성과나 자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원화운동의 존속기간이 짧았던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80년대 상황이 기록이나 사진 등을 남기기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이라는 점도 그 이유가 되고 있다. 그래서 사원화운동은 전언이나 당시 주체들의 기억을 더듬을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사원화운동의 시발은 79년 대불련 여름대회에서 민중불교를 소개하려는 시도가 보수적인 대불련 지도부에 의해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대불련이라는 틀로는 민중불교 운동의 전개가 어렵다고 판단한 일부 대불련 지도부들이 지역사찰과 연계한 새로운 운동을 모색하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사원화운동은 전문적인 불교운동가들의 탄생과 이들에 의한 불교운동의 본격적인 활동이라는 불교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운동이다. 특히 실천의 장을 중시하여 ‘블교야학’을 탄생시켰고, ‘문화총림 여래사’를 만들어 수익사업의 근거를 마련한 것도 특기할만한 일이다.

사원화운동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불국토의 구체적인 모습을 부처님 당시 구현되었던 승가 조직에서 도출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토의 실현을 승가사회에만 국한시켜버리면 중생제도와는 무관하게 되기 때문에 사회의 승가화, 정법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 이 운동의 요지이다. 승가의 대중불교적 모습이 사원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것을 사원화운동이라고 명명하였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 기존의 사찰이 갖고 있던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명칭의 채택과정에서 논란이 있었지만 그 의미가 사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승가공동체와 같은 대중공의의 아름다운 공동체를 구현하자는 의미를 사원화의 의미라고 규정하고 이런 운동이 불교개혁의 일환이 된다는 점이 중시되어 그대로 채택되었다.

사원화운동의 구체적 모델은 당시 버마(미얀마)에서 파고다(불탑)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대중 공동체라는 틀과 동남아 불교에서 논의되었던 불교사회주의 등이 제시되었다.\n\n당시 사원화운동이 진행되었던 근거지는 묘각사, 개운사, 칠보사 등의 3개 사찰이다. 특히 묘각사의 활동이 가장 큰 곳이었는데 이곳이 조계종이 아닌 불입종 사찰이었음에도 활동의 근거지가 된 것에는 당시 조계종 사찰의 대부분이 이러한 진보적 움직임에 거부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심했던 것과 묘각사 주지스님이 대불련 1기 선배라는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

묘각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활동에서 주목할 점은 ‘문화총림 여래사’의 설립이다.
수익사업의 전개를 목적으로 한 문화총림 여래사는 직업적인 불교운동가의 탄생과 직결되는 것으로 그 내부에 사원화운동의 이념 도출을 담당하는 ‘여래사불교연구회’를 두고 있으며 계간 논총 ‘청년 여래’를 발간하고 민중불교에 대한 사상 강연 등이 이루어졌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불교 야학의 설립과 운영이다. 사원화운동이 추구했던 지역공동체라는 의미의 승가는 사회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기에 지역사회에서 사찰이 그와 같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사회적 기능을 실현하는 단위가 되는 것이고 지역사회는 그와 같은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의 사원화’라는 목적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이를 위해 진행한 사업이 바로 불교 야학이다. 당시 불교 야학은 대불련 지방조직을 통하여 서울, 수원, 원주, 청주, 전주, 부산 등에서 운영되거나 운영을 준비 중에 있었고, ‘불교야학연합회’의 구성을 준비 중이었다. 실제로 묘각사의 여래사 야학, 보현사의 선우야학, 부산의 연등야학, 전주의 한바다 야학 등이 운영되고 있었다. 산업사회 속에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민중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했던 이 야학운동은 불교를 가르치는 포교의 개념과는 다른 혁신적인 활동으로 기존의 인식구조에 일대 전환을 이루는 것이었다.

당시 사원화운동의 주역들은 최연, 이희선, 노일현, 김지형, 조성열, 신상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보수적이고, 소시민적으로 서클화 되어 개혁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대불련 대신 사찰에서 불교학습모임을 운영하며 이와 같은 운동을 모색하였다.

1979년 가을 이희선은 출옥한 안동일과 만나 그와 조계사 불교학생회 고등학생회 동기인 조성열과 함께 불교 학습 모임을 하기로 한다. 이희선, 안동일, 조성열, 신상진, 김정우 등이 법련사에서 학습을 하며 사찰 대학생회를 만들 준비를 한다. 1979년 11월 만기 전역한 최연은 80년 1월 대불련 총회에서 대의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대불련은 다시 새로운 전기를 기다리게 된다. 1980년 봄, 노일현은 동국대 학생회 부활위 총무를 맡으면서 학교일에 전념하게 되고, 김지형은 대불련 부회장을 맡게 된다.

이희선은 그 해 봄의 동국대 민주화 운동을 ‘민주화 대약진 운동’으로 이름 붙이며, 학내 시위를 주도한다. 80.5.17 광주민주대항쟁 이후, 법련사 모임은 추진을 가속하여 80년 10월 초, 마침내 삼청동 칠보사에서 ‘칠보사 대학생회’(초대 회장 이희선)를 창립 한다.

칠보사에 이어 묘각사, 개운사 등에도 팀이 결성된다. 이들은 사찰 대학생회나 청년회를 내걸고 실제로는 불교 지하 서클 성격을 띠었다. 이들은 각 대학의 불교학생회의 회원들 가운데 새로운 인원을 모집하여 민중불교운동, 사회과학 등을 학습했다. 명칭은 ‘사원화 운동’을 사용했지만 경우에 따라 ‘여래사(如來使) 운동’이라고 표기하기도 하였다. 여래사 운동의 개념에 대해 최연은 "청년여래" 창간호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불교가 중생교화의 본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아울러 사회구조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인간으로서 중생을 인식해야 한다. 하화중생의 구체적인 방법론의 모색과 그 실제 적용을 위한 사회와 민중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함께 엮어 명실공히 젊은 불자들의 전열을 정비하여야만 한다. 이렇게 만난 동지들을 여래사(如來使)라 하며 여래사들의 재도전을 여래사 운동이라고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원화운동은 81년 들어 칠보사, 묘각사, 개운사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칠보사는 이희선, 조성렬, 김지형, 신상진 등이 주축이 되어 사원화운동과 민중불교운동의 이념과 이론을 정리하는데 주력하였다.

가장 왕성한 활동을 전개한 묘각사는 정법대학생회를 만들어 법우스님(김호성 교수, 동대 78)이 초대회장, 허태곤(성대 79, 현 재가연대 상임대표)이 2대 회장을 맡았고, 사원화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청계피복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조직하여 운영하였다. 묘각사 불교야학은 김건옥, 허태곤, 박수일(중대 80) 등이 실질적 준비와 수업의 책임을 맡았고 김호성, 김건옥(78학번), 허태곤(79학번), 박수일, 백은선, 옥복연, 이지연(이상 80학번) 등이 교사를 맡아 수업을 진행하였다. 최연은 문화총림 여래사를 창립하여 불교운동과 연계하는 수익사업을 준비하였다.

개운사는 주로 고려대 불교학생회가 중심이 되어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정흥모(고대 79), 왕정찬(서울대 80) 등이 경희대, 고대, 성대, 이대, 숙대 등의 불교학생회에서 새로운 후배들을 모아 주로 민중불교와 사회과학 학습을 진행하며 운영되었다. 묘각사와 칠보사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것에 비해 개운사는 이들 3개 사원화운동 사찰 가운데 활동이나 운영이 미약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 3개 사원화운동 그룹들은 서로 교류하고 81년 10월에는 묘각사에서 ‘사원화 운동 심포지움’을 함께 하며 방향과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81년 말 야학연합회를 준비하는 과정에 전주에서 진행된 MT에서 법우스님을 비롯한 참가자들이 연행되면서 파국을 맞게 된다. 전주지역부터 시작된 검거선풍은 전국에 걸쳐 약 150여 명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에 이른다. 당국은 이 사건을 동남아의 불교사회주의를 국내에 확산시키려는 것으로 파악하였고, 2~3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법우스님, 최연, 신상진 등 3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하였다.

▲ 1982년 7월 2일자 경향신문 11면, 보도
이 사건을 계기로 사원화 운동은 와해되기 시작하고 운동을 주도했던 70년대 후반 학번들 가운데 일부는 다시 대불련의 지도 기구에서 민중불교운동을 계속하거나 학내 운동권으로 흡수된다.

이후 80, 81학번의 후배그룹을 중심으로 사원화 팀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용웅(성대 80), 김영근(서울대 80), 박대선(경희대 81), 김승진(성대 81), 노태훈(성대 81) 등에 의해 이루어진 이 재건 작업을 그들은 ‘제 2기 사원화 운동’이라고 한다. 이들은 새롭게 학습 모임을 꾸려 학습을 진행하거나(묘각사), 직접 구로동에 포교당을 건설하고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학습모임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한편 대대적인 검거 선풍과 함께 문을 닫았던 불교 야학은 사원화운동 주체들에 의해 부천 석왕사에서 재개된다. 부천 석왕사에는 칠보사를 중심으로 사원화운동에 참여했던 활동가들이 다시 집결하였고, 여기에 개운사와 묘각사에서 활동한 일부 인원이 다시 모여 지역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야학을 새로 개설하였고, 여기에 이은래(성대 79) 등이 새로 합류하여 불교야학을 이어갔다. 2기 사원화 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82년 이후 맥이 끊어진 사원화운동의 맥을 이어 92년(구로동 법당) 까지 활동했으며 84, 85학번 이후의 후배들을 양성하였다.

또한 사원화운동이라고 명명하지는 않았지만 대구 보현사, 부산 등에서 최연의 지도로 이루어진 민중불교 학습 역시 2기 사원화 운동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2기 사원화운동은 1기 사원화운동에 비해 활동은 미약했으나 민중불교운동을 전파하고 진보적인 청년 재가불자를 양성하는 학교 역할을 잘 수행하였다. 이 때 배출된 불교청년들은 대불련의 지회나 지부 단위에서 민중불교운동의 저변을 확대하는 역할을 하거나, 학생운동,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사원화운동에 대하여는 이러한 평가와 비판이 존재한다. 사원화운동은 불교운동이 자연발생적으로 태동할 무렵, 목적의식적이며 조직적인 실천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향후의 불교운동이 목적의식적인 측면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하는가를 제시해 주었다는데 불교운동사적인 의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사원의 세속화와 세속의 사원화를 주장함으로써 사원의 현대사적 역할을 천명했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좀 더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그것의 한계성 오류일 것이다. 그것은 첫째, 불교운동을 부문운동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노동운동가 배출을 위한 장으로 인식했다는 점. 그리하여 외피론이라는 비판에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 둘째, 사원화 운동의 구체적 모델을 미얀마(또는 베트남)의 파고다구조에서 파악함으로써 한국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요소가 존재한다는 점. 셋째, 사원의 근거지화를 주장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사원 내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 그리하여 사찰불교 대중을 확보하는데 실패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판에는 한 가지 오류가 있다. 그것은 사원화운동이 불교운동을 노동운동가 배출을 위한 장으로 인식했다는 지적인데, 이와 같은 경향은 84년 이후 노동운동이 각 부문운동의 주류를 점하고 있던 시기에 발생된 것이다. 즉, 사원화운동은 노동운동으로의 ‘존재 이전’이 큰 대세를 이루는 시기 이전에 성립했다 와해됨으로 인해 이와 같은 논의가 진행되던 시기와 중첩되지 않는다. 따라서 불교운동을 ‘외피’로 생각했던 흐름은 적어도 84년 이전에는 성립하지 않았다. 앞선 비판에서 언급한 외피론은 84년을 전후로 진행된 불교운동 내부에서의 논쟁이기 때문에 이와 사원화운동을 결부시키는 것은 맞지 않다.

3. 대불련을 중심으로 진행된 민중불교운동
사원화운동이 좌절된 뒤 민중불교운동의 맥을 이은 것은 대불련이다. 그것은 민중불교운동의 1세대인 여익구 선생이 81년 대불련의 사무총장으로 취임하고 81년 말과 82년 초부터 사원화운동을 이끌었던 세대들이 다시 대불련과 결합하면서부터 강화되기 시작했다.

여익구 선생은 일본학자들이 연구한 불교사회주의 이론과 동남아불교국가의 불법사회주의 운동을 소개한 책 "불교의 사회사상"을 편역하여 출간함으로써 민중불교의 이념과 이론을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준 바 있다. 민족사에서 발간한 이 책은 출간 직후 당국에 의해 판매금지 조치를 받았지만 스님들이 배포를 자임할 정도로 민중불교의 이론적 토대를 이룩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가 번역한 "불타의 새얼굴"에서는 베트남의 광둑 스님의 분신에 대해 자세히 알리고 불교도들의 투쟁 방식에 대한 고민을 던지기도 하였다. 또한 불교사상을 운동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민중불교입문"으로 민중불교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대불련 사무총장을 맡은 여익구 선생은 운동의 핵심세력 형성과 의식화 작업, 그리고 민중불교의 이론 정립과 이론 개발에 주력했다. 지금도 지부의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그가 진행한 학습에 참여 후 지부로 돌아가 다시 그 내용 그대로 후배들에게 전파했던 학습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84년부터는 여익구 선생의 뒤를 이어 최연이 대불련 사무총장을 맡아 특유의 조직감각으로 전국 대불련 조직에 민중불교운동의 이념을 확산하고 전개하는 노력을 이어나갔다.

82년부터 ‘한국불교 1600년 대회’로 명칭이 바뀐 대불련 여름대회는 민중불교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지방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독재정권의 실상과 불교적 대안으로 제시된 민중불교의 이념은 전국의 불교학생회원들을 민중불교운동으로 이끌었다.

이 시기 대불련이 민중불교운동에 크게 기여한 점 가운데 하나는 소장승려들을 중심으로 전국지도법사단을 발족시킨 것이다. 여익구 선생 당시 조직되어 최연 사무총장 당시까지 존속한 지도법사단은 민중불교운동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었다. 동국대와 중앙승가대학의 젊은 스님들이 주축이 된 이 지도법사단과 진보적인 대학생들의 만남은 10. 27 법난 이후에도 무기력증에 빠져 있던 한국불교에 대한 반성과 사회참여의 정당성에 눈을 뜨는 계기를 만들었다. 지도법사들은 대학생들에게 불교를, 대학생 지도부는 스님들에게 사회과학 학습을 진행하며 시대상과 불교상, 그리고 서로의 역할에 대해 눈을 뜨게 하였다. 이를 통해 스님들에게는 새로운 청년 승가문화가 생겨났고 민중불교라는 이름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였다. 이런 공통분모가 후일 ‘비상종단’과 ‘민중불교운동연합(약칭 민불련)’에 함께 결합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주었다. 민중불교운동을 통해 성장한 스님과 청년들이 함께 불교개혁과 사회참여라는 과제를 향해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든 것이다. 그와 같은 힘이 처음 결합된 것은 신흥사 승려살인 사건으로 촉발된 구종법회와 비상종단이었다.

4. 비상종단의 성립과 좌절
10. 27 법난은 젊은 스님들의 인식을 크게 바꿔 놓았다. 특히 정화 이후 출가한 스님들에게 10. 27 법난은 한국불교와 현대의 승가상에 대한 깊은 고민을 던져주었다. 그 결과 생겨난 것이 강원을 중심으로 한 교림회와 선방을 중심으로 한 선림회이다. 중앙승가대학 역시 이와 같은 고민을 결집하는 창구가 되었다. 1981년 7월 11일부터 16일까지 전국의 학인 승려들이 중앙승가대학에 모여 ‘전국청년승려육화(六和)대회’를 개최한다. 이 대회에서 소장 승려들은 현대 사회에서 불교 사상과 승려들의 역할을 검토하고 불교계 개혁을 위한 방향을 모색하였다.

82년 6월 19일에는 동국대, 승가대,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운문사, 봉녕사 등 전국 강원에서 500여명의 학인들이 모여 수련회를 열고 ‘전국학인승가연맹’을 발족한다. 최지원, 김동성, 강종훈, 김묘주, 이해관 스님 등이 지도했다. 이들은 정법구현을 통해 중생구제에 적극 나선다는 기조를 새웠는데 현실참여적인 경향이 강했다. 교림회, 선림회, 청년승가육화대회, 승가학원 대표자 회의 등 교류를 다져오던 이들은 1983년 7월 17일 전국청년불교도연합회(약칭 청불련)를 결성했다. 이 대회에는 전국의 선원, 강원, 동대 석림회, 승가대학, 대불련, 대불청 기타 청년회 등 승가와 재가의 연합으로 약 1700여명이 참석하였다. 청불련은 ① 출가, 재가의 결속 ② 불교개혁 ③ 민족종교계승 ④ 불국정토 건설을 표방하였다. 청불련의 결성은 재가와 출가가 분리되어 행해오던 그간의 불교운동을 4부대중으로 되돌아가 재결속 시키려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으며, 출가, 재가의 연합을 통한 전국연합운동의 시작이었다는 점에서 불교운동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출, 재가를 막론한 청불련이 성립된 직후 ‘신흥사 승려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본사주지의 임명을 둘러싸고 벌어진 스님들간의 싸움이 살인사건까지 초래하자 종단은 일시에 들끓기 시작한다. 10 ? 27 법난을 겪은 뒤에도 난맥상을 해소하지 못했던 종단에 대한 반성과 분노는 곧바로 청년 불자와 소장 스님들에 의한 구종법회로 이어지고 이어 전국승려대회를 통해 비상종단이 출범한다. 1983년 9월 5일 조계사에서 거행된 승려대회에서는 살인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당시 집행부를 퇴진시키고 소장스님과 원로들로 구성된 비상종단을 구성한다.

비상종단을 주도한 세력은 청년불교도연합 소속 소장파 승려들로 민중불교운동에 공감하며 함께 성장해온 소장 스님들과 재가자 가운데 민중불교운동 1세대들이 함께 동참하였다. 비상종단은 1983년 9월 5일부터 1984년 8월 1일까지 약 1년 동안 활동했던 조계종의 임시중앙 권력 기관이다. 행정부 격인 총무원, 입법부 격인 중앙종회, 사법부 격인 호계원 기능을 모두 관장하던 혁명기관이었다. 비상종단은 1983년 6월 발생한 신흥사 사건으로 위기에 몰린 조계종과 한국불교를 개편하기 위해 종단운영 책임자를 배제하고 원로와 소장 승려들이 주축이 돼 운영했다.

1984년 7월 5일 비상종단은 본사의 폐지와 각도에 교무원, 시에 교구 신설, 종도들의 다양한 의견 수렴과 입법화를 위해 120명 규모로 하원격인 종단운영회의와 상원격인 교정회의 신설, 종단을 6부대중(비구ㆍ비구니ㆍ사미ㆍ사미니ㆍ전법사ㆍ전교)과 신도(청신녀ㆍ청신사)로 구성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제도개혁 방안을 발표하고 이틀 후인 7월 7일, 제6차 비상종단운영회의에서 종헌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밖에도 제도개혁 방안에는 사찰재산관리의 공영화, 포교원 교육원의 설립을 통한 포교와 교육의 확립, 신도조직의 체계화, 사회봉사활동 기구의 강화 등을 특징으로 하였다.

새 종헌 통과 후 1주일 만인 7월 14일 종정인 성철스님은 비상종단운영회의가 통과시킨 새 종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교시와 함께 종정직을 사임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성철스님은 종헌 개정안 중에 종단의 주체는 사부대중을 고수할 것, 교역자는 신도라는 점을 명시할 것, 상임위원회의 권한을 축소시킬 것, 비상대권을 설치할 것, 새 종단 임원진은 직접 선거할 것, 승려교육을 강화할 것 등을 반영토록 했다. 젊은 소장 스님들과 청년들의 참신한 생각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당시 상황에서 거대한 반발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1984년 8월 1일 해인사에서 거행된 승려대회에는 1,500여명의 스님들이 참가한 가운데 비상종단에서 통과시킨 새 종헌을 무효화하고 비상종단체제의 폐지를 결의하였다. 이들은 조계사를 접수하고 제24대 총무원장으로 오녹원 스님을 선출하였다. 신흥사 사태가 발생한 후 1년여 시간 동안 새로운 종단의 체계를 만들고자 했던 비상종단의 시도는 이렇게 좌절되었다. 이는 개혁의 후퇴와 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 과정에는 비상종단에 참여했던 여익구 등 재가자들에 대한 용공 혐의를 내세워 지속적으로 분열을 유도한 정권의 기만책도 작동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비상종단의 개혁안은 94년 개혁에서도 참고할 정도로 혁신적인 안을 많이 담고 있다.

5. 민중불교운동연합의 발족
사원화운동과 비상종단의 좌절 이후 민중불교운동은 85년 5월 14일 민중불교운동연합의 발족으로 이어진다. 민불련은 1985년 3월 발족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의 출범에 힘입은 바 있다. 민통련에는 승가대학에서 사회민주화를 고민했던 중앙포교연구회의 회원들이 대거 발기인으로 참여했는데,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스님과 재가자들이 힘을 모아 불교계의 대중운동조직인 민불련을 창립하게 된다.

민불련은 1983년 7월 창립되었던 ‘전국청년불교도연합회’ 인적 구성원을 보다 확대,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청년불교도연합의 주역들은 신흥사 승려살인사건을 계기로 성립된 비상종단의 중추가 되었지만 비상종단의 와해와 함께 큰 실패를 맛보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를 계기로 불교의 사회적 역할과 민주화에 대한 참여를 고민하는 스님과 재가자라는 소중한 자산을 얻게 되었고, 이들이 결합하여 결성하게 된 것이 민불련이다. 민불련에는 진보적인 소장 스님들과 불교의 사회참여와 포교, 민주화를 위한 활동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계속하던 사부대중이 함께 참여하였다.

민불련은 창립취지문에서 당시 한국사회의 상황을 ‘정치적 악순환과 부정부패, 독점재벌을 위한 특혜정책, 지역사회, 계층 간의 불균형 심화로 민중의 생존권이 위협받는 상태’로 규정하고,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불교의 건설, 주체적인 민족문화의 창달, 부의 공평분배와 조국의 자주평화적인 통일성취를 민중불교운동의 목표’로 한다고 하였다. 민불련은 매우 적극적이고 투쟁적인 실천을 펴나갔다. 그러나 민불련의 활동도 창립 1년이 못되어 급속하게 퇴조한다. 첫째로 86년 5월 인천사태 배후조종자로 지도부가 구속되거나 수배되자 활동에 큰 타격을 입은 외적인 요인 때문이고, 둘째는 진보성, 투쟁성 등이 기성불교권의 외면을 받아 교단 내에서 고립되는 내적인 요인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기존 민중불교운동 출신 활동가와 그렇지 않은 활동가들의 간극, 스님과 재가자들의 간극이 존재하였고, 이것이 내부적으로 다양한 논쟁과 균열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스님들이 별도의 독자적 조직을 구성하도록 만든다.

6.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의 발족
민불련의 퇴조에도 불구하고 민중불교운동의 한 쪽 맥은 86년 6월 5일 승려 2백21명에 의해 창립된 정토구현승가회에 의하여 계승된다. 민불련이 재가 중심이었다면 정토승가는 출가중이 중심이 된 것이었다.

84년의 유화조치 이후 85년 2월 12일 치러진 12대 총선에서 여당이었던 민정당은 35%라는 저조한 득표율을 얻는데 그치면서 민주화의 요구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대세임을 확인시켜주었고 대통령 직선제를 향한 국민의 거센 요구를 촉발시켰다.

이러한 요구는 86년이 되면서 더욱 거세지고 드디어 스님들도 독자적으로 사회를 향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5월 9일 모두 152명의 스님들이 조계사에서 ‘불기 2530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는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문에서 스님들은 ‘민주화의 핵심과제인 민주제개헌이 확실히 실현되어야 하며 이제까지 잠정적으로 유보되어 있던 민중의 제반 권리가 새 헌법에 담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문제에 침묵하던 스님들이 개헌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실행한 것은 당시 잇단 교수들의 선언과 함께 사회적 관심을 모으게 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 1986년 6월 5일 민불련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스님들을 중심으로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약칭 정토승가회)’가 창립한다. 동국대학교 정각원 불상 앞에서 진행된 창립총회에는 218명의 스님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지도위원에 지선스님, 의장에 청화스님, 부의장에 진관, 목우스님, 사무국장에 성연스님 등이 선출되었다. 마침내 스님들만으로 구성된 사회운동단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힘은 86년 9월 7일 해인사 승려대회에서 불교자주화의 함성으로 터져 나온다.

7. 86년 9ㆍ7 해인사 승려대회
1986년 9월 7일 해인사에서 승려 2,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된 해인사 전국승려대회는 소장파 개혁승려들의 주도 하에 일부 중진승려가 결합하면서 전 불교계의 커다란 호응과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 대회는 오녹원 스님이 총무원장에 재직하던 때부터 준비되고 있었기 때문에 대회 직전에 총무원장으로 선출된 서의현 스님까지 참석하는 등 범종단적인 대회로 개최되었다. 이날 대회에서는 ‘불교자주화, 사회의 민주화’를 천명하면서 불교관계악법 즉각 철폐, 사찰관광유원지화 중지, 불교탄압 전면거부, 10ㆍ27법난 해명 등을 요구하였다.

10ㆍ27법난에 대한 사과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80년대 초반부터 대불련과 소장 승려들에 의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지만 이러한 요구가 범종단적으로 거론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는 젊은 불자와 청년승려들의 활발한 민주화 운동과 불교자주화를 위해 기울였던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해인사 승려대회는 종래의 보수적이며 정권과 유착된 모습을 보여 온 불교계가 그 동안의 모순을 딛고 국가권력과의 관계를 바르게 설정하려고 한 점,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한 세력으로 활동에 동참함으로써 민주화에 대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점에서 교계 내외에 큰 자극을 주었다. 이는 불교계에 대한 제반 세력의 인식을 바꾸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9ㆍ7 승려대회는 한국불교 현대사에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불교관계악법 철폐를 강력히 요구함으로써 그 동안 불교자주화를 가로막고 있던 제도적 굴레에 대한 자각을 이루기 시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아울러 불교자주화 운동과 사회민주화 운동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민주화 없이는 진정한 불교자주화 역시 성취될 수 없음을 통감하고 전 불교대중에게 동참을 호소하면서 불교의 위상을 재정립하기에 이른 것이며 조직적인 계기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그 이유이다. 9ㆍ7 해인사 전국승려대회는 비상종단 해체 이후 잠잠했던 불교계의 개혁요구가 다시 표면화되며 각 현안에 대한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때 발안된 10ㆍ27법난에 대한 사과요구, 불교관계악법의 폐지, 사찰의 유원지화 중지, 교과서 왜곡과 편파성 중지 등의 요구와 종단의 개혁에 대한 의견은 비상종단의 실패를 딛고 새로운 불교계의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해인사 승려대회는 한국사회에도 획기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이에 대해 ‘한국불교가 종교로서의 자주성회복 노력뿐 만 아니라 현실문제에도 새로운 개안을 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아야 하며 참다운 불교 본연의 제자리로 회귀를 위한 큰 걸음이 되기를 바란다’고 정리하고 있다.

86년 9월과 10월에 걸쳐 터져 나온 불교계의 외침은 80년 10.27법난으로 각성된 종단 자주화의 의지를 만천하에 고한 시발점이 되었고 정부와 정치권으로 하여금 제반 관계 악법의 재정비를 시작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어진 87년의 상황은 매우 급박하였다.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의 발생과 은폐 조작, 4.13 호헌조치, 이한열 사망과 6월 항쟁, 그리고 6.29 선언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가 이어졌다.

불교계는 이 투쟁의 대열에 동참하였다. 스님들과 불교 단체들은 ‘박종철군 49재 봉행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조계사는 물론 전국 각 사찰에서 49재를 지낼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민주진영은 불교단체가 추진했던 49재일인 3월 3일을 ‘3.3 고문추방 민주화대행진’으로 명명하고 전국적으로 평화적인 가운데 추모의 분위기 속에 대행진을 준비하였고, 불교계 또한 조계사에서 49재를 올리고자 하였다. 이날 지선스님을 비롯한 20여명의 스님들과 민불련, 대불련 소속 학생과 신도 등 수백여 명은 49재를 위해 조계사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경찰의 진입 저지에 막혔고 이에 맞서 ‘고문추방 인권회복’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결국 경찰에 막힌 참석자들은 노상 49재 천도재를 지내고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날 부산 사리암에서는 종단이 주최한 49재가 박종철의 가족과 친척, 신도 등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되었다.

전국사찰에서 거행된 박종철의 극락왕생을 위한 49재는 스님들로 하여금 한국사회의 현실과 민주화의 필요성을 새롭게 각성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6.29라는 정권의 항복선언으로 민주화의 길이 열릴 것을 기대했던 것은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 후보의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민주세력 역시 비판적지지, 후보단일화 그리고 독자후보론 등을 주장하며 분열되고 말았다. 불교계의 진보적 소장스님과 민주화 세력들 역시 선거 국면이 초래한 분열과 그 후과로 인해 서로 다른 입장으로 나뉘어졌다.

1988년 3월 25일 송산, 명진, 성문, 현응 스님이 주도하는 대승불교승가회(이하 대승승가회)가 창립되었다. 대승승가회는 사회참여보다는 종단개혁에 중심을 두었던 측과, 대선 당시 후보단일화 노선을 주장했던 측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8. 통불협의 탄생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올림픽 남북 공동개최 논의와 통일 논의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불교계는 이와 같은 논의에 앞장서고 다양한 단체를 모아 논의를 진행하였다. ‘민족화합공동올림픽추진불교본부’가 결성되고 다양한 단체들이 참여하는 논의와 통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불교 사회운동의 방향은 한국사회의 민주화에서 통일운동으로 새로운 전환을 시작하였고 12월4일 13개 불교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민족자주통일불교운동협의회(약칭 통불협)가 결성된다.

통불협의 탄생은 초기 민불련 이후 출가자와 재가자, 각 단체가 함께 참여하는 조직을 구성하였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민불련의 퇴조에도 불구하고 대불련과 정토승가회 등 승가운동 단체는 굳건히 서 있었고, 이와 같은 조직들의 결합은 새로운 흐름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NL이라고 이름되는 운동권의 통일논의를 그대로 수용하는 한계를 나타내기도 하여 이전의 반독재민주화 투쟁만큼 절박한 공감대를 일으키지 못한 것도 문제로 지적할 수 있다.

맺는 글
90년대 들어 민중불교운동은 거의 쇠퇴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중불교운동의 맥을 계승한다고 볼 수 있는 곳은 대불련과 통불협 정도에 불과하고, 최석호 법사가 이끄는 정토포교원(현 정토회)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80년대 말 동구권의 몰락과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운동의 지향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 결과 민중불교운동의 맥은 사라지거나 설사 계승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상당히 온건화, 종교화되었다.

정토승가회(후신 실천승가회)가 종단의 개혁이라는 점에 눈을 돌리게 되는 과정을 본다면 그 운동의 맥은 불교 내부를 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축적된 힘이 새롭게 응축되어 분출한 것이 바로 94년 종단개혁이다. 종단 개혁의 주체들은 80년대 민중불교운동이 배출한 출, 재가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의 응축된 힘이 한국 사회 최초의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성취한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80년대 민중불교운동의 흐름은 단지 80년대 민주화에 기여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종단 개혁이라는 성과까지 창출한 것이며 종단 개혁의 정신에 그 운동의 이념과 취지가 잘 투영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오늘의 시점에서 94년 종단 개혁의 정신을 곰곰이 들여다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길게는 100년에 걸친 숙제의 해결이자 70년대 후반부터 피로 써온 개혁의 집약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제 불교계 내부에 이와 같은 운동적 지향도, 주체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작금의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고 새로운 불교 운동을 주창하고 실천할 것이 뜻있는 사부대중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과제일 것이다.

[불교중심 불교닷컴] 2015년 08월 21일 (금) / 서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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