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달라져야한다-11 / 미얀마 승가와 경전결집

(보검법사)
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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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목) 06 16, 2016 12:03 pm

한국불교 달라져야한다-11 / 미얀마 승가와 경전결집

전체글글쓴이: lomerica » (토) 08 20, 2016 7:02 am

미얀마 승가와 경전결집

사진1:아소카 대왕과 목갈리푸타 티사 대장로가 임석한 제3차 경전결집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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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불교가 한국의 일부 불자들에게 어필하는 이유를 한번 분석 정리해 보자. 누차 하는 이야기이지만,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는 시대가 흐르면서 환경이 바뀌면서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해 왔다. 부처님께서 대열반에 드신 다음, 한참 뒤 경전결집회의가 열렸다. 제1차 경전결집회의는 경과 율이 주 내용이었다. 대개 기원전 400년경으로 보고 있는데, 당대 마가다 왕이었던 아자타샷투의 후원으로 마하카샤파의 증명으로 라자그리하에 있는 삿타파니 동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집내용은 부처님의 설법과 승가의 율장이 주 내용이었다. 전해오는 기록에 의하면 경은 아난다가 율은 우팔리 존자가 암송해 냈으며, 많은 비구들이 동의하여 확정하는 형식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비담마피타카(논장)도 포함되었다고 하는데, 확실치 않다. 특히 율장에 있어서는 율장은 물론 소소계도 지킬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당시 인도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셨던 마가다어는 문자가 없었다. 빨리어가 부처님께서 직접 구사하셨던 언어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근접했던 언어가 아닐까 하는 것이 학자들의 연구인데, 아무튼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내용이 빨리어로 집성되어 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께서는 빨리어로 진리를 설하셨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에는 문자가 없었고, 또 이런 진리의 전승이 구송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말하자면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구송전달이었다. 비단 불교승가에만 있었던 전통은 아니고, 불교보다도 앞서서 성립한 바라문교에서부터 이런 전통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제2차 불전결집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의 내용보다는 율장에 초점이 있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지 100년 정도 지난 다음에 개최하게 되었는데, 이미 이때 몇 개의 파가 형성되어 있을 정도로 승가는 다양해 졌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부처님 당시에도 비구들의 수가 많아지고 비구니 승가까지도 생겨서 불교승가는 그야말로 광범위한 지역에 까지 확장되고 있었다. 제2차 결집회의가 열리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야사란 장로비구가 베살리에 갔을 때, 이 지방 비구들의 계율이 다소 느슨해지고, 뭔가 승가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있음을 보고 700명의 보수파 비구들을 모아서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한데, 이미 다소 계율에 신축성을 둔 진보적인 비구들도 1만 명이 모여서 따로 집회를 가질 정도로 이때 보수 진보파의 대립이 극심했던 것 같다. 핵심은 율장대로 지키기엔 시대환경이 변했고, 비구들의 심리 또한 다소 계율의 변화를 원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제3차 경전결집회의는 불교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데, 기원전 251년 경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의 후원으로 목갈리푸타 티사(Moggaliputta-Tissa327BC–247 BC) 대장로의 주도로 이루어졌는데, 목갈리푸타 티사 대장로 비구는 아마도 승가의 최고 지위에 있던 존경받는 분이었음이 틀림없는데, 파탈리푸트라(Pātaliputra 현재 파트나)에서 개최됐다. 이런 근거는 실론의 사서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3차 경전결집의 핵심은 경율만이 아닌 논장이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는 점이다. 목갈리푸타 티사 대장로의 저술로 알려진 《까타와뚜Kathāvatthu 論事》에 잘 나타나 있듯이, 이때쯤 되면 여러 부파의 관점이 논란이 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후 제4차 결집은 두 곳에서 열렸는데, 상좌부 전통은 실론에서 기원전 1세기경 이루어졌고, 스라바스티바다 부파에서는 기원후 1세기 경 카슈미르에서 개최되었는데, 쿠샨제국의 카니슈카(Kanishka:재위127-151 CE) 대왕의 후원에 의해서 주로 《아비담마(구사론)》 텍스트에 중점을 두고 결집하였다. 이제 이야기하려는 본론은 상좌부 전통을 계승해서 미얀마에서 5차 6차 경전결집회의를 주관했다는 사실이다.

사진2: 미얀마의 한 불교대학에서 비구들이 강의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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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경전결집회의는 1871년 민돈 왕의 후원으로 버마 만달레이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필자도 만달레이를 직접 가봤지만, 현대 미얀마불교는 만달레이가 본산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지역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불교가 활발하게 살아 있는 곳이다. 버마 승가에서 제 5차 경전결집회의를 주도할 정도였다는 것은 상좌부 권에서 정통성을 유지해 왔다는 점일 것이다. 19세기의 상좌부 불교는 단연 버마가 앞서 있다는 점이다. 실론에서 이식해 온 빨리 삼장불교를 완벽하게 5백년간 소화했다는 점이다. 실론이나 태국 보다 버마가 인도에서 실론으로 이어지는 상좌부의 정통성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5차 경전결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승가가 건실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만달레이에 가보면 이때의 삼장 결집을 전부 대리석에 새겨서 석경으로 보존하고 있을 정도로 그 신심과 자신감은 대단하다고 하겠다. 상좌부의 경전어인 빨리어를 완벽하게 소화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 정도로 버마 승가는 불교의 원형성을 유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2400명의 자격 있는 비구장로들이 모여서 결집을 했지만, 버마 밖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사진3: 제6차 경전결집회의가 열린 카바 아에 사원에 있는 마하파사나 구하 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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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차 경전결집회의가 버마에서 이루어졌는데, 제5차 경전결집회의가 외부 세계에서 인정을 하지 않는데 대해서 항상 찜찜하게 생각하던 차, 1954년 카바 아에 사원에서 개최된 것이다. 제5차 회의가 열린지 83년 만에 우 누 수상의 후원으로 버마 정부 차원에서 1954년 5월 17일에 입재를 해서 1956년 5월 24일에 회향을 함으로써 경율론 삼장의 주석서와 복주석서까지를 완벽하게 결집하여 불멸 2500주년을 맞아 버마어로 완성했고, 다른 상좌부 국가의 비구들도 참여해서 완성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위빠사나 스승으로 유명한 마하시 사야도 대선사가 경전결집의 질문자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사진4: 카바 아에 사원 大동굴에서 개최된 제6차 경전결집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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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마하시 사야도(1904–1982) 삼장 대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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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승가와 경전결집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봤는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미얀마 불교의 교학의 튼튼함이다. 미얀마가 명상으로 뜨게 된 배경도 이처럼 상좌부의 적통으로 교학의 토대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현재 미얀마에 가서 명상을 하는 불자들의 인구가 상당하다. 대부분이 삼장을 도외시한 채, 명상에만 집중하는데 미얀마불교의 경전에 의한 교학의 깊이를 이해한 다음 명상에 집중해야 순서라고 생각한다. 우리 불교가 참고해야할 것은 미얀마 승가의 건실함이다.

해동선림원 지도법사=보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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