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廣德)과 엄장(嚴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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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목) 06 16, 2016 12:03 pm

광덕(廣德)과 엄장(嚴莊)

전체글글쓴이: lomerica » (월) 10 23, 2017 7:49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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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불 나무 법 나무 승

삼국유사에 나오는
광덕과 엄장스님 이야기입니다.

광덕(廣德)과 엄장(嚴莊)
문무왕(文武王) 때에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아 밤낮으로 약속했다.

"먼저 안양(安養)으로 돌아가는 자는 모름지기 서로 알리도록 하지."

광덕은 분황(芬皇) 서리(西里)에 숨어 살면서 신 삼은 것으로 업을 삼아, 처자를 데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나무를 베어 불태우고 농사를 지었다.

어느날 해 그림자가 붉은빛을 띠고
소나무 그늘이 고요히 저물었는데,
창밖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이미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 살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라."

엄장이 문을 밀치고 나가 보니
구름 밖에 천악(天樂) 소리가 들리고
밝은 빛이 땅에 드리웠다.

이튿날 광덕이 사는 곳을 찾아갔더니
광덕은 과연 돌아가 있었다.

이에 그의 아내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호리(蒿里)를 마치고 부인에게 말했다.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어떻겠소."
광덕의 아내도 좋다고 하고 드디어 그 집에 머물렀다.
밤에 자는데 관계하려 하자 부인은 이를 거절한다.

"스님께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구하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엄장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물었다.
"광덕도 이미 그러했거니 내 또한 어찌 안 되겠는가."

부인은 말했다.
"남편은 나와 함께 십여 년을 같이 살았지만 일찍이 하룻밤도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거늘,
더구나 어찌 몸을 더럽히겠습니까.

다만 밤마다 단정히 앉아서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렀습니다.

또 혹은 십륙관(十六觀)을 만들어 미혹(迷惑)을 깨치고 달관(達觀)하여
밝은 달이 창에 비치면 때때로 그 빛에 올라 가부좌(跏趺坐)하였습니다.

정성을 기울임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가지 않으려고 한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체로 천릿길을 가는 사람은
그 첫걸음부터 알 수가 있는 것이니,
지금 스님의 하는 일은 동방으로 가는 것이지
서방으로 간다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엄장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물러나
그 길로 원효법사(元曉法師)의 처소로 가서
진요(津要)를 간곡하게 구했다.

원효는 삽관법(삽觀法)을 만들어 그를 지도했다.

엄장은 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쳐 스스로 꾸짖고,
한 마음으로 도를 닦으니 역시 서방정토로 가게되었다.

삽관법은 원효법사의 본전(本傳)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속에 있다.

그 부인은 바로 분황사의 계집종이니,
대개 관음보살 십구응신(十九應身)의 하나였다.

광덕에게는 일찍이 노래가 있었다.

달아, 서방까지 가시나이까,
무량수불(無量壽佛) 앞에
말씀 아뢰소서.

다짐 깊은 부처님께 두손모아,
원왕생(願往生) 그리워하는
사람 있다고 아뢰소서.

아아, 이 몸 남겨 두고
사십팔원(四十八願)이 이루어질까.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郎)·진자사(眞慈師)
신라 제 24대 진흥왕(眞興王)의 성(姓)은 김씨(金氏)요
이름은 삼맥종(삼麥宗)인데, 혹 심맥종(深麥宗)이라고도 한다.
양(梁)나라 대동(大同) 6년 경신(庚申; 540)에 즉위(卽位)했다.

백부(伯父) 법흥왕(法興王)의 뜻을 사모해서
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어 널리 절을 세우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중이 되기를 허락했다.

왕은 또 천성이 풍미(風味)가 있어서 크게 신선을 숭상하여
민가(民家)의 처녀들 중에 아름다운 자를 뽑아서 원화(原花)를 삼았으니,
이것은 무리를 모아서 사람을 뽑고
그들에게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을 가르치려 함이었으며,
이것은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大要)이기도 했다.

이에 남모랑(南毛娘)과 교정랑(교貞娘)의 두 원화를 뽑았고,
여기에 모여든 사람이 3,4백 명이나 되었다.

교정(교貞)이 남모(南毛)를 질투하여 술자리를 마련하여
남모에게 취하도록 먹인 후에 남몰래 북천(北川)으로 데리고 가서
큰 돌을 들고 그 속에 묻어 죽였다.
이에 그 무리들은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서 슬피 울다가 헤어졌다.

그러나 그 음모를 아는 자가 있어서,
노래를 지어 거리의 어린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남모의 무리들은 듣고 그 시체를 북천(北川) 속에서 찾아내고
교정랑을 죽여 버리니 이에 대왕(大王)은 영을 내려 원화의 제도를 폐지했다.

그런 지 여러 해가 되자 왕은 또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영을 내려 양가(良家)의 남자 중에 덕행(德行)이 있는 자를 뽑아
이름을 고쳐 화랑(花娘(郞))이라 하고,
비로서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花郞) 국선(國仙)의 시초이다.

그런 때문에 명주(溟洲)에 비(碑)를 세우고,
이로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것을 고쳐 착한 일을 하게 하고
웃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유산하게 하니
오상(五常)·육예(六藝)와 삼사(三師)·육정(六正)이 왕의 시애에 널리 행해졌다.

(<국사國史>에 보면, 진지왕眞智王 대건大建 8년 경庚(병丙)신申에
처음으로 화랑花郞을 받들었다 했으나 이것은 사전史傳의 잘못일 것이다).

진지왕(眞智王) 때에 와서
흥륜사(興輪寺) 진자(眞慈; 혹은 정자貞慈라고 함)대사가
항상 이 당(堂)의 주인인 미륵상(彌勒像) 앞에 나가 발원(發願)하여 맹세해 말했다.

"우리 대성(大聖)께서는 화랑(花郞)으로 화(化)하시어
이 세상에 나타나 제가 항상 수용(수容)을 가까이 뵙고 받들어
시중을 들게 해 주십시오."

그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이 날로 더욱 두터워지자,
어느날 밤 꿈에 스님 하나가 말했다.

"내 웅천(熊天; 지금의 공주公州) 수원사(水源寺)에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자(眞慈)는 꿈에서 깨자 놀라고 기뻐하여
그 절을 찾아 열흘길을 가는데 발자국마다 절을 하며 그 절에 이르렀다.

문 밖에 탐스럽고 곱게 생긴 한 소년이 있다가,
예쁜 눈매와 입맵시로 맞이하여 작은 문으로 데리고 들어가 객실로 안내하니,
진자는 올라가 읍(揖)하고 말한다.

"그대는 평소에 나를 모르는 터에 어찌하여 이렇듯 은근하게 대접하는가."

소년이 말한다.
"나도 또한 서울 사람입니다.
스님이 먼 곳에서 오시는 것을 보고 위로했을 뿐입니다."
이윽고 소년은 문 밖으로 나가더니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자는 속으로 우연한 일일 것이라 생각하고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절의 스님들에게 지난 밤의 꿈과 자기가 여기에 온 뜻만 얘기하고 또 말했다.

"잠시 저 아랫자리에서 미륵선화를 기다리고자 하는데 어떻겠소."
절에 있는 중들은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근실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千山)이 있는데
옛부터 현인(賢人)과 철인(哲人)이 살고 있어서 명감(冥感)이 많다고 하오.
그곳으로 가 보는 것이 좋을 게요."

진자가 그 말을 쫓아 산 아래에 이르니,
산신령(山神靈)이 노인으로 변하여 나와 맞으면서 말한다.
"여기에 무엇 하러 왔는가."

진자가 대답한다.
"미륵선화를 보고자 합니다."
노인이 또 말한다.
"저번에 수원사(水源寺)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는데
다시 무엇을 보려는 것인가."

진자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이내 달려서 본사(本寺)로 돌아왔다.
그런 지 한 달이 넘어 진지왕(眞智王)이 이 말을 듣고는
진자를 불러서 그 까닭을 묻고 말했다.

"그 소년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니
성인(聖人)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왜 성 안을 찾아보지 않았소."

진자는 왕의 뜻을 받들어 무리들을 모아 두루 마을을 돌면서 찾으니,
단장을 갖추어 얼굴 모양이 수려한 한 소년이
영묘사(靈妙寺) 동북쪽 길가 나무 밑에서 거닐며 놀고 있었다.

진자는 그를 만나보자 놀라서 말한다.
"이분이 미륵선화다."
그는 나가서 물었다.
"낭(郎)의 집은 어디에 있으며 성(姓)은 누구신지 듣고 싶습니다."

낭이 대답한다.
"내 이름은 미시(未尸)이고,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여의어 성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에 진자는 그를 가마에 태워 가지고 들어가 왕께 뵈었다.
왕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았다.
그는 화랑도(花郞徒) 무리들을 서로 화목하게 하고
예의(禮儀)와 풍교(風敎)가 보통사람과 달랐다.

그는 풍류(風流)를 세상에 빛내더니 7년이 되자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자는 몹시 슬퍼하고 그리워했다.
미시랑(未尸郎)의 자비스러운 혜택을 많이 입었고
맑은 덕화(德化)를 이어 스스로 뉘우치고 정성을 다하여 도(道)를 닦으니,
만년(晩年)에 그 역시 어디 가서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해설하는 자가 말한다.
"미(未)는 미(彌)와 음(音)이 서로 같고
시(尸)는 역(力)과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 가까운 것을 취해서 바꾸어 부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 감동된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 나타났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가리켜 미륵선화라 하고
중매하는 사람들을 미시(未尸)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진자의 유풍(遺風)이다.
노방수(路傍樹)를 지금까지도 견량(見郎)[樹]이라 하고
또 우리말로 사여수(似如樹; 혹은 인여수印如樹)라고 한다.

찬(讚)해 말한다.
선화(仙花) 찾아 한 걸음 걸으며 그의 모습 생각하니,
곳곳마다 심은 것은 한결같은 공로일세.
졸지에 봄은 되돌아가고 찾을 곳 없으니,
누가 알았으리,
상림(上林)의 한 때의 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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